몇천 년 전의 고대인들은 수학적 계산법이나 과학적 원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대 문명권에서는 수학이나 과학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지요. 그뿐 아니라 고대인들이 남긴 학문적, 기술적 유산들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60진법을 만들어 낸 수메르인들
1시간은 60분으로 돼 있습니다. 61분은 다시 60초로 되어 있지요. 이런 셈법에서는 61초나 61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60분이 지나면 다시 1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요. 이를 60진법이라고 합니다. 60진법을 확대한 사례도 있어요. 원의 각도는 360가 최대 수치입니다. 360도를 넘으면 원을 한 번 다 돈 것이 되므로 다시 1도로 돌아가야 하지요. 이런 수학적 원리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수메르인들이었어요. 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한 것도 그들입니다.
수메르인들은 태양, 물, 불, 달, 바람 등 자연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신마다 1번부터 60번까지 고유 번호를 매겼습니다. 수메르인이 섬기던 최고의 신은 ‘안’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안에게 초고의 숫자인 60을 줬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60진법이 생긴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은 60진법만 남긴게 아니지요. 수메르 문명이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가 지구라트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지요. 이 제단을 통해 하늘과 가까워진 덕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했습니다. 천문학은 이집트와 황하 일대에서도 발달했지요.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나일 강과 황하가 자주 범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 강이 넘칠지 예측하기 위해서는 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강의 범람 시기를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관리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천문학이 발달하면서도 달력도 발명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용한 달력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을 측정한 태양력이었지요. 태양의 움직임과 천문학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주에 있는 수많은 별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합니다. 따라서 별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현재 시간을 계산하고 미래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지요. 나일 강과 황하 유역은 다른 지역보다 농업이 특히 발달했던 곳입니다. 씨앗을 언제 뿌려야 할지, 수확물을 언제 거둬야 할지를 계획하려면 앞으로의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필요가 있었어요. 바로 이것 때문에 태양력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태양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천문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 별의 이동 경로를 낱낱이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요. 태양력은 별의 이동을 잘 예측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중국에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함께 파악한 새로운 달력을 사용했습니다. 그 달력이 바로 태음 태양력입니다. 반면에 메소포타미아는 처음부터 태음력을 썼어요. 태음력은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에 따라 날짜를 세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양력과 태음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달력이 생겨나서 지배층은 더 큰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규모 관개 시설을 지어 물을 잘 관리한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더 존경받고 떠받들어진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지요. 농경이 발달한 지역은 대체로 큰 강의 하구입니다. 아무리 관개 시설을 많이 짓고 물을 관리한다고 해도 강은 때때로 범람했어요. 강의 범람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요. 강은 범람할 때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많은 무기질을 실어 왔지요. 하지만 강이 범람하는 시기를 예측하지 못하면 애써서 가꾼 농작물이 썩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은 강물이 범람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를 예측했지요. 언제 씨앗을 뿌려 얼마 동안 작물을 키우고, 언제 농작물을 수확해야 하는지도 예측했습니다. 모두 달력 덕분이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지배자의 지시가 없으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지배자가 독점했기 때문이지요. 왕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어요. 고대 세계에서 왕들은 시간을 독점해 관리할 수 있었기에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죠.
고대인들의 뛰어난 건축술과 의학
고대 문명권의 건축 기법 역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유적만 봐도 그 점을 알 수 있지요. 인더스 문명의 도시들은 하나같이 완벽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이렇게 도시를 계획에 따라 짓는 방법은 그 후 여러 국가들이 도시를 정비할 때마다 활용해 왔지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술은 중세 이후까지 계속되었지요. 당시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많은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그 신전들은 천장을 둥그렇게 짓고 끝에는 뾰족한 아치를 얹은 형태였지요. 훗날 페르시아의 왕궁에서도 이런 건축 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두 문명권에서는 모두 벽돌을 사용해 건축물을 지었어요. 이후 벽돌은 건물을 짓는 데 아주 좋은 재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 이집트 사람들은 처음으로 지렛대를 사용했어요. 높이 100미터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바위가 필요했습니다. 어떤 바위는 멀리 홍해까지 가서 운반을 해 왔지요. 그 바위를 운반하고, 다시 피라미드에 얹기 위해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지렛대의 원이죠. 또 이집트의 건축 기술은 기하학의 발전으로도 연결되었어요. 나일 강은 다른 강보다 특히 범람이 자주 일어났어요. 때로는 그저 물이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지형까지 바꿔 버렸습니다. 이때 지형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보고 매우 놀랍니다. 수천 년이 흘렀는데 시체의 보관 상태가 놀랍도록 좋기 때문이지요. 과학자들이 재현한 미라의 제작 과정은 아주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우선 시신을 깨끗하게 씻은 뒤 장기를 모두 꺼냅니다. 위와 간, 허파, 창자 같은 장기가 썩지 않도록 향료를 잘 바릅니다. 이와 같은 방부 처리 작업을 모두 끝내면 각각 4개의 병에 따로 보관합니다. 심장은 붕대로 잘 싼 다음, 다시 시신 안에 집어넣습니다. 저승 세계에서는 심장의 무게로 그 사람의 죄를 판단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 신이 시망의 무게를 저울로 단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심장이 가벼우면 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무거우면 나쁜 사람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처벌을 받습니다. 미라를 만든 동기는 이처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의학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이렇듯 고대인들이 이룩한 문명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들이 밝혀질수록 우리가 고대인에게 감탄하고 고마워할 일도 많아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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