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에 관한 이야기와 특징들: 정복 전쟁과 법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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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에 관한 이야기와 특징들: 정복 전쟁과 법률의 탄생

by &#$@*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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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에서 문명이 발달한 시점은 신석기시대 이후의 일입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었어요. 일단 계급이 갈라지자 권력은 점점 더 지배층에 집중되었습니다. 지배층은 청동으로 만든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고작 해야 돌로 된 무기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층에게 복종을 해야 했습니다. 

 

지배층은 대규모 관개 시설을 만들고 신전이나 대형 무덤과 같은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큰 작업에는 많은 인부가 필요했지요. 인부로 일하는 것은 물론 피지배 계급이었지만, 노동자를 구하는 더 빠른 방법은 따로 있었어요. 지배층은 군대를 이끌고 이웃 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정복했고,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은 노예가 됐습니다. 그 노예들은 대규모 토목 공사에 인부로 동원되었지요. 정복 전쟁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이었습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평야 일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정복의 역사,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사방이 탁 틔어 있습니다. 주변에 큰 산맥이나 사막도 없었어요. 이런 지형은 전쟁을 하기에 좋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특히 도시 국가 간의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강력한 왕들은 비옥한 땅을 힘으로 빼앗고, 많은 노예들을 부렸지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는 그야말로 정복의 역사입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탄생한 것은 오늘날로 치면 이라크 남부에 있는 수메르 지역이었습니다. 수메르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기원전 3500년쯤 시작된 수메르 문명은 처음에는 평화롭게 발전해 갔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000년쯤 청동기 문명이 시작되자 정복 전쟁이 수시로 터졌어요. 

 

수메르 지역의 여러 왕 가운데 루갈작게시란 인물이 크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곧 수메르 일대를 평정해 역사상 가장 큰 왕국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곧 북쪽에서 아카드인들이 내려왔습니다.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들을 정복하고 아카드 왕국을 세웠습니다. 아카드 문명을 연 왕은 사르곤 1세였습니다. 그는 루갈작게시보다 더 큰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모두 정복한 것이지요.

 

정복 전쟁이 활발한 시대에는 왕의 권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힘이 있어야 정복한 지역을 모두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르곤 1세도 정복지에 총독을 보내 통치했어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체를 처음 시도한 셈입니다. 이렇게 번성했던 아카드 왕국도 이란 고원으로부터 쳐들어온 이민족의 침입에 무너졌죠. 이때부터 수메르인과 아카드인, 즉 메소포타미아인들은 100여 년간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100년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도시 국가 우르의 왕이 마침내 이민족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도 곧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30 년이 지난 다시 아모리인이라는 이민족의 침입이 시작됐습니다. 아모리인들은 바빌론에 수도를 세운 뒤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문명이 바빌로니아 문명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금세 메소포타미아가 평화로워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 뒤로도 100여 년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또다시 여러 도시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웠답니다. 이 혼란기를 끝낸 인물이 바로 함무라비 왕입니다. 그는 과거에 사르곤 1세가 그랬던 것처럼 정복 전쟁을 벌였고,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다시 통일했어요. 그리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에 바빌론은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바빌로니아 이후에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까지 이어집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국에 의해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하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도시 국가들이 번갈아 가며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제왕 자리를 차지했지요.

 

 

정복 전쟁과 함께 성장한 고대 문명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주변에서 발달했습니다. 처음에 이 지역은 나일 강 상류의 상 이집트와 하류의 하 이집트로 나뉘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3000년쯤 상 이집트의 왕인 나르메르가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도시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쯤 상 이집트의 왕인 나르메르가 나일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도시 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했어요. 그는 마침내 이집트 전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수도를 멤피스로 정했지요. 그는 자신을 ‘파라오’라고 불렀어요. 이때부터 고대 이집트 파라오 제1왕조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개방적인 메소포타미아 지형과는 달리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 폐쇄적인 지형을 이루고 있던 까닭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하면 이민족의 침입이 훨씬 적었어요. 하지만 정복 전쟁의 큰 흐름은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조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이집트에서는 제1왕조, 제2왕조, 제3왕조 하는 식으로 왕조에 숫자를 붙여서 부르지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국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가 제30 왕조였답니다. 물론 페르시아 이전에도 여러 민족이 이집트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제15왕조와 제16왕조는 아시아 민족인 힉소스인들이 세운 왕조였습니다. 힉소스인들은 100여 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답니다. 리비아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은 이집트에 제23왕조와 제24왕조를 세웠습니다. 이집트 남부에 있는 누비아인들이 만든 제25왕조는 사상 처음으로 흑인 파라오를 배출한 왕조입니다.

 

중국 황하 문명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중국은 일찍부터 봉건제 질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중국 역사상 첫 왕국으로 기록돼 있는 은나라는 원래 상족이 건설했다고 해서 ‘상나라’라고 불렸어요.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국인 하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나라의 탕 왕이 반란을 일으켜 하나라를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는 수도룰 호경으로 옮겼어요. 이때부터 상나라는 ‘은나라’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 호경이란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은허’입니다. 은나라가 멸망한 방식은 하나라가 멸망한 방식과 같습니다. 서쪽 지역에 있는 은나라 제후인 서백창이 주변의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더니, 이윽고 서백창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은나라의 왕을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 나라가 바로 주나라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황하 문명은 이처럼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거치면서 서서히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인터스 문명은 조금 다릅니다. 인더스 문명은 단 한차례의 전쟁으로 멸망하고 말았어요.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인도의 서북쪽에서부터 들어온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고 자기들의 세계를 세운 거지요. 인더스 문명은 단 한 번의 침략으로 파괴됐지만 정복 전쟁의 역사인 것만큼 다른 문명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법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많아진 도시 국가에서는 왕과 귀족, 종교 사제, 평민, 노예의 신분 구별이 확실했습니다. 종교와 정치권력을 모두 장악한 왕이 가장 높았고, 그 밑에는 귀족들과 종교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귀족 다음으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있었고, 가장 아래에는 노예들이 있었어요. 이런 상태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삼각형 모양이 되지요. 이 때문에 고대 도시 국가의 계급 형태를 ‘피라미드형 계급 구조’라고도 부른답니다. 

 

정복당한 국가의 백성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노예가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도 있었지요. 나라가 커지면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반드시 넉넉해야만 했어요. 

 

이 신분 질서가 깨지면 고대 사회는 그대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만약 수적으로 가장 많은 평민과 노예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기라도 한다면 왕이나 귀족들도 무사할 수 없겠지요. 이 때문에 지배층은 신분 질서를 위지하기 위해서 법률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이 만든 우르남무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우르남무 법전은 기원전 2100년에서 기원전 20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 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1952년, 고대 도시 니푸르 유적에서 발견된 이 법전은 현존하는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지요. 우르남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오래된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으로 여겨졌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것으로 높이 2m가 넘는 동기둥에 새겨져 있어요.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지요.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에 발견됐습니다. 발견된 법전을 연구해 본 결과 우르남무 법전보다 약 3세기 정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요.

 

그림 자료: 우르남무 법전
(그림 자료: 우르남무 법전)

 

두 법전은 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형벌을 정해 놓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가령 사람을 죽인 범죄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법전의 맨 앞에 있습니다. 살인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나 두 법전을 세부적으로 보면 다른 점이 많이 눈에 띕니다.

 

먼저 우르남무 법전은 금전적인 내용이 꽤 많아요. 가령 어린아이를 납치한 사람이나 부인과 이혼한 사람은 모두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경우에도 벌금을 냈고, 노예가 주인에게 함부로 대했을 때도 벌금을 냈습니다.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한 사람도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여기서 벌금이란 남에게 입힌 손해에 대해 돈으로 물어주는 배상금을 뜻합니다. 이 밖에도 여러 조항이 있는데, 대부분의 조항이 금전적인 배상을 명시하고 있어요. 우르남무 법전이 만들어진 우르 제3왕조 시대는 상업이 번영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경제적 손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어요. 범죄자에게 배상의 책임을 물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반면에 함무라비 법전에는 신체적 처벌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규정한 조항도 많이 들어 있어요.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는 식의 복수를 합법화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거나 치아를 부러뜨린 사람에 대해서는 똑같은 식으로 눈알을 빼고 치아를 부러뜨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수술 중에 환자가 죽었다면 의사의 손을 잘랐습니다. 집이 무너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집을 지은 사람도 죽였습니다. 도둑질을 한 사람에게는 먼저 돈으로 물건 값을 물어 줄 기회를 줬지만, 돈이 없으면 사형시켰지요. 이처럼 함무라비 법전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격했지요.

 

그림 자료: 함무라비 법전
(그림 자료: 함무라비 법전)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이 냉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무렵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당연히 계급 사회는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함무라비 왕은 이런 상황에서 우르남무 법전처럼 경제적인 처벌만 한다면 피지배층을 관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아마 잔인한 신체적 체벌이 있어야 피비배층이 반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이 있어요. 이 말은 신분에 따라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즉, 같은 신분인 귀족이 귀족을 해치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정신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귀족이 노예를 해치면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았지요. 반대로 노예는 귀족을 다치게만 하더라도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고대 법전은 평등의 정신을 구현했다기보다는 계급 구조를 위한 방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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