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농부]는 구두쇠 농부의 일생에 대한 엘리너 파전의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돈 한 푼 쓰지 않던 구두쇠 처든 제인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결혼했는데 제인은 딸, 꼬마 제인만 남기고 죽습니다. 그 후 처든은 꼬마 제인 덕분에 남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처든은 죽으면서 딸에게 돈이 아닌 마을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남겨 주었습니다. 처든의 행동이 바보 같은 행동인지 현명한 행동인지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 언더본 마을에 로버트 처든이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로버트 처든이 윌리엄 스토우라는 일꾼을 게으르다면서 내쫓던 잠이었어요. 윌리엄은 문간에서 덜덜 떨며 사정을 했습니다. “처든 씨, 제가 쫓겨나면 저뿐만 아니라 저의 식구들까지 굴어 죽습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그러자 로버트 처든이 말했어요. “나는 바보가 아닐세. 총 알 한 방에 죽은 새한테 뭣 하러 총알을 써? 누구든지 내 시간을 뺏는 작자는 내 돈을 축내는 인간이야. 자네가 바로 내 시간을 뺏고 있네그려. 난 한 번 결정을 내리면, 그걸로 끝이야.” 가엾은 윌리엄이 이렇게 말했어요. “언젠가 처든 씨와 처든 씨의 가족들에게 제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오면, 그때 저도 두 번 생각하지 않겠어요.
처든은 매섭게 쏘아붙였어요. “내가 자네같이 변변치 못한 놈들한테 일을 시켰다면 늙은이가 될 때를 대비해서 재산을 이만큼 모으지도 못했어. 기름진 땅이 천 에이커, 소가 이백 마리, 본마켓 시장에 가게도 있지. 언더본 마을에 선술집도 있고, 비든온허니 언덕에는 방앗간도 있다네. 본마켓의 은행에 넣어둔 돈도 해마다 6%씩 불어나지. 행여나 내가 자네 같은 가난뱅이한테 아쉬운 소리나 늘어놓을 것 같나? 윌리엄 스토우 자네 같은 작자들한테 사정을 할 사람이 혹시 있더라도, 그게 나는 아닐 걸세. 나는 자네처럼 식구가 없어. 설령 있다 해도, 나야 자식 열두 명에 그 자손들까지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지. 아마 내 자식들은 부족한 게 뭔지 평생 모를걸. 자네야 그 문을 나가자마자 당장에 알게 되겠지만. 이제 가 보게. 가서 한번 당해 봐.” 윌리엄 스토우는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그날 밤, 언더본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정말 잘살지만 아주 못된 그 농부 얘기가 자자했답니다.
언더븐 마을에서는 처든 씨한테 이렇게 저렇게 괴로운 일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처든은 온 나라에서 가장 적은 품삯으로 가장 오랫동안 일꾼들을 부려먹었습니다. 남의 물건은 꼭 헐값에 사들였고요. 교회 헌금 접시에는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잔치가 열려도 동전 한 닢도 기부하지 않았지요. 선술집은 처든의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는 늙은이에게 맡겼는데, 잔뜩 주눅이 들어서 맥주 한 잔도 외상을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싸게 부릴 수 있으면, 당장 일꾼들에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쫓아냈습니다. 희멀건 우유 찌꺼기를 돼지 먹이로 빌려 주면 나중에 돼지 뒷다리로 돌려받았지요. 추수한 밭에 떨어진 이삭도 주워 가지 못하게 하고, 거지들이 오면 문 앞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든은 점점 부자가 되었답니다.
해가 갈수록 처든은 더 많은 돈을 저축하고, 더 넓은 땅을 사들였으며, 더 많은 가축들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건초도 처든네 건초가 그 지방에서 제일 좋았습니다. 옥수수면 옥수수, 과일이면 과일, 어느 것 하나 안 되는 게 없었고, 제일 비싼 값에 팔렸지요. 하지만 이웃 사람들과 그 집 하인들은 처든 씨를 미워하고, 또 무서워했습니다. 처든이 나날이 번창하는 한편, 마을은 점점 가난해져 갔어요. 집집마다 뜰의 나무들은 메말라가고, 집 구석구석이 고장 나고, 아이들은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모든 걸 처든이 싹 쓸어갔으니까요. 비든온허니 언덕에 있는 처든의 방앗간에서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찧으면 찧을수록 처든의 통장에 돈이 쌓여갔습니다. 언더본 마을에서 본마켓까지, 또 본마켓에서 비든온허니 시내까지, 이 인정머리 없는 사람에 대해 좋게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처든이 매몰차게 윌리엄 스토우를 내쫓아서 그에게 원망이 담긴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윌리엄 스토우가 한몇 마디 말 중에서 한 구절이 처든의 가슴에 꽂혀 잊혀지지 않았거든요. 바로 ‘처든 씨와 처든 씨 식구들’이란 말이었습니다. 윌리엄이 ‘언젠가 처든 씨와 처든 씨의 가족들에게 제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오면’이라고 했을 때, 로버트 처든의 가슴에 박힌 말은 ‘언젠가’라거나 ‘도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처든 씨와 처든 씨 가족들’이란 말은 밭을 갈건, 은행 통장을 넘기건 처든의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어 올렸어요. 그렇다고 처든이 그 생각에 곰곰이 빠져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 말은 마치 풍년이거나 창고가 꽉 찼을 때 부르는 노래들에 으레 따라붙는 후렴구처럼 귓가를 맴돌았건 거지요.
이따금씩 생각의 파도에 밀려 높이 솟아오르는 자갈돌처럼 윌리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요.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처든은 그날 본마켓 가축 시장에서 제인 플라워의 얼굴을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하지만 처든의 눈길이 제인의 얼굴에 머물렀을 때, 그 순간 난생처음 돈벌이가 전혀 안 되는 것을 갖고 싶어 졌습니다. 하지만 처든은 돈으로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처든은 그날 낮에 제인 플라워라는 아가씨를 처음 봤지만, 그날 밤에는 이미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처든은 뭐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지요. 은은히 빛나는 갈색머리, 발랄하게 웃는 입, 주근깨가 난 뽀얀 살결, 해맑은 갈색 눈동자, 제인 플라워를 처음 본 순간 처든은 가슴속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제인 플라워는 그녀가 데리고 나온 암소를 살펴보는 손님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처든의 귀에 제인의 목소리는 갈증 난 목을 적시는 샘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여태 목마른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말입니다.
처든은 가까이 가서 고삐에 매인 암소를 살펴보며 말했습니다. “나도 암소 한 마리를 사려고 하는데… 얼마면 되겠소? “어머나, 죄송해요. 방금 팔았거든요.’ “얼마나 팔았소?” 제인이 소값을 말하자, 처든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1파운드 더 주겠으니, 내게 파시오.” 그러자 제인이 대답했어요. “참 고마운 분이시네요. 하지만 저희 소는 이미 팔렸답니다.” 로버트 처든에게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 건 남자, 여자, 아이, 어른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벌써 돈을 받은 게요?” “아뇨. 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아직 흥정이 끝난 게 아니오. 나한테 더 비싸게 팔 수 있소.” “적당한 값에 팔렸어요. 그 분에게 이미 소 값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더 비싸게 팔려고 하면 안 되지요. 그렇죠? 하지만 말씀은 정말 고맙습니다.”
“좋은 소인데, 너무 싼 값에 팔았소. 헌데 아가씨는 이 근방에서 처음 보는데, 그렇지요?” 처든이 말했어요. “저는 캠스톡에 사는 존 플라워 씨의 딸이에요. 언젠가 저희 아버지도 만나 보시면 좋을 텐데…. 지금은 편찮으세요. 그래서 돈을 마련하려고 저희 소 뷰티를 팔러 제가 시장에 나왔습니다. 저기 뷰티의 새 주인이 오시네요. 저 분은 가축을 잘 돌봐 줄 것 같아요. 그렇죠? 잘 가라, 뷰티야.” 제인은 뷰티의 뿔 사이에 입을 맞췄어요. 제인은 명랑하게 말했지만, 처든은 그런 제인의 눈동자를 보자 또 한 번 마음이 철렁 움직였어요. 잠깐 동안 처든은 제인의 입맞춤을 받는 소가 미울 지경이었습니다. 소를 산 사람이 와서 제인 플라워에게 소 값을 치렀지요. 제인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처든은 제인의 뒷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았어요.
처든은 제인에게서 뷰티를 사간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처든은 그에게 뷰티가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다며 트집을 잡았어요. 그날 저녁에 처든은 존 플라워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제인 플라워가 처든을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누군가가 자신을 반겨 주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든이 제인의 손을 잡으니 제인은 처든의 어깨너머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흥분해서 처든의 손을 꼭 쥐었어요. “그렇소. 제인, 당신의 뷰티요. 뷰티가 아가씨에게 돌아왔소.” “하지만 어떻게…??” “내가 뷰티를 샀소. 그리고 이제 그 소는 아가씨 것이오. 뷰티가 살던 외양간에 데려다주시오.” 제인은 한동안 말을 잃고 처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처든 옆을 스쳐 가서 뷰티의 목을 끌어안았어요. 처든은 또 한 번 자신이 뷰티가 아닌 것이 화가 났습니다. 제인이 자기 대신 뷰티를 안아 주었으니까요. 그날 밤 뷰티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나서, 제인은 처든에게 안으로 들어와서 아버지를 좀 만나고 가라며 부탁했어요. 아버지에게 고마운 분을 만났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척 고마워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처든은 제인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제인 아버지는 처든을 바라보면서 더듬더듬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처든은 뷰티 값을 받지 않고 그냥 제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제인은 너무 고마워하면서 혹시 뷰티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고마워했지요.
삼 개월이 지나 터든은 뷰티를 자신의 농장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사이 제인의 아버지, 존 플라워는 세상을 떠났어요. 처든이 아내를 집으로 데려오자, 언더본 마을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지게 놀랐지요. 처든의 신부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함박웃음을 짓는 것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제인 플라워의 결혼 생활은 11월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동안 제인은 다른 건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처든은 제인을 집 안에만 고이 있게 하고, 볼일이 있을 땐 처든 혼자 밖에 나가서 예전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서는, 제인이 “정말 고마워요!”하고 말하거나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려고 애쓰며 남몰래 즐거워했어요. 처든은 제인이 돈이 하나도 안 드는 사소한 것들로도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난 딸기를 따다 주기만 해도 제인은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걸 알게 된 뒤에도 처든은 비싼 머릿수건을 사다 준다거나, 이따금씩 달콤한 과자 같은 걸 사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인은 딸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까맣게 몰랐어요. 같이 살았던 짧은 시간 동안 제인은 남편을 고마운 분이라고만 불렀답니다.
처든은 엄마 이름을 따서 아기를 ‘제인 플라워’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제인’ 앞에 ‘꼬마 제인’이라고 불렀답니다. 처든은 ‘제인’보다 ‘꼬마’를 더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꼬마’라는 말을 붙이면 엄마의 이름과 구분되니까, 아내가 영영 잊히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처든이 그렇게 ‘꼬마’ 제인을 부르다 보니 몇 년 후, 모두들 처든의 딸을 ‘꼬마 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처든 같은 사나이는 처음부터 아기를 싫어했을 것 같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꼬마 제인은 처든의 마음속에서 엄마 제인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엄마가 하던 일을 해 냈습니다. 물론 꼬마 제인이 이 말을 배우고 나서부터이지요. 그전까지 처든은 아기 치대 맡에 앉아서 꼬마 제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어요. 들판에 나갈 때는 인디언 아낙처럼 꼬마 제인을 등에 업고 다녔습니다.
처든은 아기에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처든이 아기를 쳐다보거나 널찍한 등에 업고 있을 때면, ‘처든 씨와 처든 씨의 가족’이라는 그 말이 떠올랐지요. 거기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어요. 꼬마 제인의 입에서 ‘빠’라는 말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다른 말들도 하기 시작했어요. 처든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그건 마치 겨울 동안 준비해 온 여린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봄에 꽃이 피어나는 놀라웠어요. 하지만 꼬마 제인이 갓 피어난 제비꽃처럼, 옥수수 새순처럼, 새로운 말들을 내뱉기 전까지는 신기하다는 생각은 꼼에도 못 했었거든요. 처든은 꼬마 제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모든 걸 새롭게 바라보았습니다.
꼬마 제인의 두 돌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 처든은 넓은 밭에서 처음 열린 산딸기를 발견했어요. 2년 전에 엄마 제인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꼬마 제인은 산 딸기 열매가 송골송골 맺힌 이파리를 받고 기뻤어요. 그래서 소리치며, “고마운 빠빠!”라고 했습니다. 꼬마 제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말에 로버트 처든의 가슴속에 심장이 또 한 번 움직였어요. ‘엄마에게 배운 게 아니라면 꼬마 제인은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을까?’ 처든이 꼬마 제인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그 말이었어요. 아내가 죽은 후 처든은 그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처든은 꼬마 제인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장에서 작은 장난감들을 사다 주고, 들판에도 더 자주 데리고 나가서 새둥지나 이런저런 것들을 보여 주었지요. 처든은 또 꼬마 제인에게 뭐 보여 줄 게 없나, 뭔가 알려 줄 게 없나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서 미처 몰랐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처든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것들 덕분에 꼬마 제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니까요. 처든은 이제 고맙다는 그 말까지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꼬마 제인을 그 말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주 가끔씩 말할 수도 있었거든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자신이 정말 고마운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지도 못했고, 또 상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꼬마 제인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했어요. 어느 날 처든은 문간에서 어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든은 꼬마 제인이 우는 줄 알고 달려 나갔어요. 꼬마 제인은 거기 있었어요. 그런데 울고 있는 아이는 꼬마 제인보다 한 살 더 많아 보이는 다른 여자 아이였습니다. 꼬마 제인이 아장아장 걸어와서 우는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얘가 동전을 잃어버렸대.” 그러고는 다시 문가로 걸어가더니, 우는 아이에게 말했어요. “고마운 우리 아빠가 동전을 주실 거야.” 꼬마 제인은 믿음에 찬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처든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우는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지켜 온 철칙이 또 하나 깨어졌지요. 이제껏 처든은 한 푼도 남에게 공짜로 주는 법이 없었거든요. 처든은 그 애에게 동전을 주면서 아주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동전을 하나 주는데, 엄청난 재산과 영영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쩌면 정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꼬마 제인이 굳게 믿는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소중한 보물인 듯 동전을 꼭 쥐고 길가로 뛰어 올라 갔습니다. 처든이 꼬마 제인에게 그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꼬마 제인은 그 아이는 몰리라고 말했습니다. 몰리가 누구냐고 물으니 꼬마 제인은 몰리가 그 애 이름이라고만 답했지요. 그래서 처든은 더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답니다.
그날 저녁에 언더본 마을에 있는 쉰두 채의 집집마다 로버트 처든이 생전 처음 동전 하나를 남에게 공짜로 주었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어요. 그것도 처든에게 쫓겨난 윌리엄 스토우의 딸, 몰리에게 말이에요. 며칠 뒤에 더 많은 소문이 이 집 저 집으로 들불처럼 번졌어요. 처든의 집에서 어떤 거지가 빵과 낡은 부츠 한 켤레를 받아 왔다는 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빵뿐 아니라 고기랑 부츠랑 모자를 받아 왔다고 했지요. 아니, 맥주도 한 병 받아 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심지어는 처든이 입던 코트까지 벗어 주었다고 했어요. 이런 소문들은 실제로 그 거지를 만난 사람이 직접 보고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난 거지요.
처든은 학교에 은화 두 닢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꼬마 제인은 학교 가기에는 아직 어렸지만, 학교 잔치에 갔다가 환호성을 지르며 돌아왔어요. 처든이 길을 가다가 잔치가 열린 걸 보았는데, 꼬마 제인이 아이들 틈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처든이 꼬마 제인을 안고 집에 오는 길에 물었어요. “응, 아빠! 정말 좋아!” 꼬마 제인이 아빠 턱 밑에 환한 얼굴을 묻으며 또 말했어요. “정말 좋아요. 고마운 아빠!” 웃음을 머금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처든의 얼굴에는 난감한 표정이 나타났어요.
처든은 꼬마 제인이 마을 아이들을 초대해 잔치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꼬마 제인이 초대받은 학교 잔치가 너무너무 좋았었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꼬마 제인이 여는 파티에 꼭 와야 한다고 했어요.
꼬마 제이은 아빠 무릎에 앉아서 학교 잔치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조잘조잘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꼬마 제인은 집에서 하는 잔치가 장소가 학교에서 아빠의 건초밭과 헛간으로 바뀐 것이고, 다른 것은 다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처든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어요.
처든이 잔치를 연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답니다. 뭔가 함정이 있을 거라고까지 생각했지요. 하지만 잔치에 함정은 없었어요.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맛있게 먹었어요. 전혀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꼬마 제인은 아이들 사이로 뛰어다니며 너무 재미있게 노느라 어떤 음식이든 한 입 이상 먹을 수 조차 없었지요. 한 사람과 1분 이상 놀 겨를이 없었답니다. 아이들은 꼬마 제인을 쓰다듬고 친하게 부대끼며 놀았어요. 꼬마 제인이 부잣집 아이였기 때문은 아니었어요. “꼬마 제인, 이리 와 봐! 지푸라기로 새둥지를 만들어 줄게.” “아니야, 여기 짚더미에서 미끄럼을 타자, 꼬마 제인! 내가 꽉 잡아 줄게.” “꼬마 제인, 네가 줄 차례야. 우리가 줄을 돌릴게.” “꼬마 제인, 우리 아가, 어디 있니? 여기 있다!”
이 모든 광경을 보면서 로버트 처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처든의 눈빛에는 처음 느껴 보는 흥분이 가득했어요. 이 날 이후, 아이들은 매주 다과 파티를 하곤 했지요. 꼬마 제인은 마을 곳곳을 마음껏 뛰어다녔고 어디서나 환영받았답니다. 저녁이면 꼬마 제인은 ‘고마운 아빠’이 무릎에 앉아서 재잘거렸어요. 토미네 엄마가 아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수지 무어네는 빗물이 벽으로 새어 들어와 침대가 다 젖었고, 게이퍼 제닝스는 독수리가 엄마 닭을 물어 갔다는 등등의 이웃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꼬마 제인은 해맑은 얼굴로 마을에 일어난 슬픈 일들을 이야기했지요.
꼬마 제인은 자기 아빠한테 슬픔을 고치는 만병 통치약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빠는 텅 빈 곳간을 채우고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빠가 있는 한 꼬마 제인은 슬픔이 뭔지 몰랐지요. 처든은 소중한 자기 딸이 슬퍼하지 않도록 그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주었답니다. 예전에는 언더본 마을에서 처든의 농장만 부유했었는데 차츰 마을 전체가 살기 좋은 곳이 되어 갔어요. 부족한 것들이 점점 채워져 갔습니다. 언더본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꼬마 제인처럼 물이 새지 않는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어요. 또 누구나 정성껏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만큼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더본은 그 지방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이 됐고, 이 마을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얘깃거리가 되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느라 돈이 들었습니다. 마을에 쓰인 모든 돈은 꼬마 제인의 미래를 위한 돈에서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그걸 잘 아는 처든은 이번만 도와주고 더 이상은 퍼 주지 말아야겠다고 거듭거듭 다짐했지요.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먼저 자신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처든은 꼬마 제인의 앞날보다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이웃에게 퍼 주는 일을 계속했어요. 그런 버릇은 처든의 머리와 가슴에까지 길이 들었습니다. 서서히 스며들어 취하는 술처럼 말이지요. 일단 시작한 이상 처든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멈출 수 없었어요. 아을 사람들 중 처든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처든의 등 뒤에서도 ‘밥 처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고, 어쩌다 처든을 마주치면 용기를 내서 반갑다고 말을 거는 사람도 생겼지요.
한 번은 꼬마 제인이 아파서 어린이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꼬마 제인이 다 나아서 집을 돌아올 때까지, 처든은 걱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얼마 뒤, 병원 건물에 불이 났습니다. 어린 환자들은 겨우 구출됐지만, 병원 건물은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자 마을에는 처든이 병원을 다시 짓기 위해서 비든온허니에 있는 방앗간을 팔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워낙 급하게 팔아서, 처든이 손해를 보고 팔았다는 거예요. 방앗간을 산 사람은 좋아서 껄껄 웃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처든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요.
꼬마 제인을 품에 안은 처든은 두 사람에게 뚜벅뚜벅 가난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처든은 자신이 남을 돕는 일에 너무 빠져 든다는 것 말고는 뭐 하나 겁낼 까닭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처든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요.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처든이 그 일을 해 주었어요.
구두쇠였던 처든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처든은 남에게 무언가를 해 주는게 버릇이 되어 버렸는지 몰라요. 꼬마 제인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아마 곧 끝났을 거예요.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돈을 쏟아 부으면 결국은 그 끝이 있을테니까요. 처든이 자신의 아이에게 끊임없이 계속 줄 수 있는 길은 모든 아이들에게 주는 길뿐이었어요. 처든은 바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진 것이 적어질수록 더욱 자유롭게 남에게 주게 되었습니다. 처든이 한 일 가운데는 마을 사람들이 아는 일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한 일이 훨씬 더 많았지요. 그런데 처든은 그런 일들을 줄곧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했습니다.
처든의 재산은 매주 점점 줄어 갔습니다. 그렇수록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처든에게 감사하며 처든을 칭송했지요. 처든은 꼬마 제인의 앞날을 위해 조금도 돈을 따로 남겨 두지 않았어요. 본 마켓의 가게가 경매로 넘어가고, 처든이 마지막 재산을 다 팔아 버리고, 선술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해서, 그 사실을 꼬마 제인이 알게 됐다고 해서 그게 꼬마 제인에게 무슨 문제가 되었을까요? 어느 날 처든은 큰 농장집을 팔고 숲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으로 이사를 갈 때 꼬마 제인은 좋아서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이 밥 처든의 기름진 농장을 경작했고, 본마켓의 고아원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후원인에게 지금까지 받아 본 후원금 중 가장 큰 액수의 수표를 받았습니다. 밥 처든은 이러다가는 재산이 한 품도 남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요.그래서 그 걱정 때문에 몸도 지쳐 갔어요. 게다가 처든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사에게 주는 돈이 아까워서 병원도 가지 않고 있었어요. 처든은 꼬마 제인이 언젠가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기부를 했던 거지요.
처든과 꼬마 제인은 숲 속 오두막에서 1년 정도 함께 살았어요. 그 동안 처든의 커다란 계획들은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쓸 재산이 남아있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에 처든은 이마의 주름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눈빛의 근심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지요. 처든은 이제 꼬마 제인의 앞날을 위해 남겨 놓은 돈이 한 춘도 없었어요. 그래서 처든은 꼬마 제인의 미래에 대해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근심이 사라지는 법이거든요.
처든은 자신의 옛 농장에서 일꾼으로 일을 하고 거기서 받은 품삯으로 두 식구가 먹을 것을 마련했습니다. 처든과 꼬마 제인은 일이요일이면 산책을 나가고, 길에서 거지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무엇이든 거져 주었지요. 처든은 주머니가 텅 빈 채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면서도 맑은 얼굴로 꼬마 제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꼬마 제인에게 과일 바구니며, 꿀 같은 걸 주고 싶어 했어요. 또 돼지를 잡는다거나 하면 꼭 밥 처든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뭐든 밥 처든과 꼬마 제인에게 나눠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이른 아침이었어요. 꼬마 제인이 윌리엄 스토우의 집에 찾아와 말했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아빠가 일어나질 않아요.” 윌리엄 스토우가 처든을 살피러 갔습니다. 그날 꼬마 제인은 하루 종일 몰리네 집에 있었어요. 그다음 날도, 밥 처든이 땅에 묻히던 그 다음 날도 몰리네 집에 머물렀습니다. 묘지로 가는 길에 장례 행렬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뒤를 따랐어요. 그 무렵 밥 처든이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으며, 꼬마 제인이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때 누구 입에선가 ‘본마켓의 고아원’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소리를 듣고 윌리엄 스토우가 벌컥 화를 냈어요. 밥 처든의 아이를 절대로 고아원에 보낼 수 없다면서 말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서로 꼬마 제인을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밥 처든에게 도무지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신세를 졌기에 꼬마 제인을 돌보고 싶어 했습니다. 언더본 마을의 쉰두 집에서 서로 꼬마 제인을 맡겠다고 아우성쳤어요. 그래서 결국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서로 꼬마 제인을 맡기로 했지요. 꼬마 제인은 즐겁게 이웃집에 머물렀습니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제인은 아빠를 두고 지금껏 살았던 사람 중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밥 처든의 이야기는 그 마을은 물론 더 먼 곳까지 ‘고마운 농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어요. 덕분에 언더본 마을도 유명해졌고, 마을 사람들은 모든 아이들을 위하느라 자신의 아이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고마운 농부 밥처든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처든은 결국 꼬마 제인에게 마을 전체를 남기고 간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지붕과 난롯가가 꼬마 제인의 것이었거든요.
하부르타식 질문의 예
- 로버트 처든의 성격을 어떠했나요?
- 로버트 처드는 윌리엄 스토우의 말이 후렴처럼 귓가에 맴돌았을까요?
- 로버트 처든이 제인 플라워에게 잘해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 로버트 처든이 죽은 후 꼬마 제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로버트 처든이 죽은 후 마을 사람들은 왜 꼬마 제인을 저마다 맡겠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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