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산화: 오디세우스의 기발한 전술- 목마 계략에 트로이아가 함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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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산화: 오디세우스의 기발한 전술- 목마 계략에 트로이아가 함락되다

by &#$@*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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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의 목마 계략으로 트로이아에 접근하다

그리스군은 아킬레우스라는 최고의 전사를 잃기는 했지만 전투에서는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트로이아군은 중요한 뛰어난 장수들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헬레네를 데려왔던 파리스도 결국 필록테테스가 쏜 화살에 쓰러졌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트로이아를 공략할 결정타가 없었습니다. 예언자 헬레누스의 예언에 따라 트로이아의 아테나 신전에 있는 신상 ‘팔라디온’을 훔쳐오기도 했지만 트로이아는 함락되지 않았답니다. 팔라디온은 예로부터 트로이아 성을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숭배되던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오디세우스가 궁리해 낸 것은 바로 목마 계략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군은 마치 후퇴하는 것처럼 진영을 불태워 없애고, 성문 앞에 거대한 목마만을 남겨둔 채 트로이아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함대는 트로이아에서 보이지 않는 근체의 테네도스 섬에 가서 대기하고 있었고, 목마 속에는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50명의 정예 병사가 숨어 있었지요. 말하자면 ‘목마 계략’이란 철군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방심하게 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리는 작선이었죠. 성 밖에서 공격해서는 트로이라를 함락시키기가 어렵다는 판단한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 그 속에 숨긴 병사들로 트로이아 성을 교란시키고 성문을 활짝 열어 그리스군이 들어올 수 있게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윽고 트로이아 사람들이 성문 앞에 놓인 거대한 목마와 텅빈 그리스군 진영을 발견했습니다. 목마에는 ‘고국으로의 귀환을 감사하는 뜻에서 이 선물을 아테나 여신께 바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물러갔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했지요. 

그런데 목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요. 섣불리 성안으로 들여 놓기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리스군의 한 병사가 붙잡혀 왔습니다. 그를 추궁하자 자신은 오디세우스로부터 도망쳤다고 하면서 목사는 그리스군이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마를 성안에 들어가면 트로이아가 더욱 강성해질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성문보다 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병사는 그리스군의 첩자 사논이었지요. 트로이아 사람들은 시논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트로이아가 그리스에 함락되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아폴론 신궁의 사제 라오콘은 이것은 그리스군의 간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제지했지요. 그리고 트로이아의 공주이면서 예언술이 뛰어난 카산드라(아폴론의 사랑을 받고 예언술을 익히자마자 아폴론을 거부하여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도 목마의 뱃속에는 병사들이 숨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성 안에 들여놓으면 트로이아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트로이아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때 갑자기 해상에서 큰 뱀 두 마리가 나타나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의 몸을 감고 숨통을 조여 죽였습니다. 이것을 본 트로이아 사람들은 더욱더 목마가 신성하 ㄴ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 힘을 합쳐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목마를 들여놓고 승리를 확신한 트로이아 사람들은 술에 취해 춤 추고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십 년 만의 화려한 향연은 한밤중까지 이어졌고 흥분에 지친 사람들은 마침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모두가 잠이 들어 조용해졌을 때 즈음, 목마 안에서 무장한 그리스 병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근처 섬에서 대기하던 그리스 함대가 봉화 신호를 받고 서둘러 트로이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이미 열어 놓은 성문으로 순식간에 들이닥쳐 트로이아 성을 점령했지요.

트로이아 성안으로 집결한 병사들은 밤새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잡는 등 약탈과 살육을 벌였습니다. 성안 곳곳이 불타올라 마치 대낮 같이 밝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리아모스 왕은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 살해되고, 헥토르의 어린 아들은 그리스 군사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로 무자비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트로이아는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함락되어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신의 벌을 치르며 고향으로 귀환하다

마침내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그리스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 고국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영광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불행과 고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귀환 항해 도중에 익사한 이도 있었고, 향로를 잘못 들어서서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포세이돈이 그리스군의 잔혹한 약탈과 살육을 벌 주기 우해 폭풍을 일으키는 등 바닷길을 거칠게 했기 때문입니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미케나이에 무사히 도착하지만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에게 살해당합니다. 트로이아 함락의 공로자 오디세우스는 항해 도중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서 10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하기도 했습니다(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귀국 도중의 항해와 고난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험난 고난 여정 끝에 가장 늦게 귀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면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곁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다시 왕비로 군림하면서 만년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미노스 문명과 미케나이(미케네 문명)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야기는 미노스 문명과 미케나이(미케네) 문명이 번영했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고고학 발굴로 증명된 것처럼 그리스 신화와 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증거로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과 미케나이 문명권의 유력 도시였던 미케나이와 테바이, 그리고 아테나이 등지에는 수많은 신화가 남겨져 있지요.

에번스가 발견한 미노스 문병은 기원전 2천 년 경 에게해 남쪽 크레타 섬에서 일어난 문명이었습니다. 크레타 섬은 중해 동쪽에 위치해 일찍부터 오리엔트 세계와 교류하였고 궁전 건축과 도기, 석제 용기 등에서 예술성이 풍부한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또한 면적이 넓고 평야가 많아 문명이 꽃피울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미노스 문명이 전성기를 맞이했던 기원전 1600년경 그리스 본토에서는 미케나이 문명이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미케나이 문명은 크레타 섬의 영향을 받아 전투와 수렵을 주제로 그린 도기나 금속 제품과 같은 공예품이 크게 발달했답니다. 궁전 건축도 성벽과 성호가 업었던 크레타 궁전과는 달리 견고한 성채의 모습으로 발전했지요.

기원전 1400년경에는 크레타 대신 본토의 그리스인들이 에게해 지역의 패권을 쥐었고, 또한 지중해 일대까지 진출했습니다. 미카나이 문명의 절정기에 도달한 것이지요. 기원전 1200년경에는 미케나이 왕의 총지휘 아래 트로이아 원정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트로이아 전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지 얼마 뒤지 않아 미케나이의 여러 왕궁은 파괴되었고 문명도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도리스인과 해양 민족의 침략 등 여러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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