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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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배경

by &#$@*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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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무엇일까요?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겨우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7천 년 경부터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의 생산력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사회와 문화 전반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지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18세기 중엽에 인류는 또 한 번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기술 혁신을 통해 그간의 농경 사회가 산업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바로 ‘산업 혁명’입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에 힘입어 ‘정보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이처럼 인류의 문명은 지금껏 몇 번의 획기적인 변화를 겪으며 발달해 왔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단계를 구분 지을 만큼 획기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는 ‘혁명’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볼 때, 혁명(Revolution)은 한 체제 안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이 민중의 지지를 받아 낡은 권력 집단을 몰아내고, 사회 체제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혁명을 파괴적인 힘으로만 여겼지요.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사회의 도덕과 신념이 타락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은 중세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종교의 권위에 기대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중세의 특권층은 혁명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바라보았지요.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혁명에 대한 시각도 점차 바뀌었습니다. 근대에 들어 혁명은 한층 진보된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계기이자,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은 이런 생각이 현실로 이뤄진 사례라고 볼 수 있지요.

 

이 가운데에서도 1789년에 있었던 프랑스혁명은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시민 혁명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사람들이 프랑스혁명을 특별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중세를 흔들어 버린 새 시대의 사상들

혁명이나 전쟁 같은 크나큰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게 아니지요. 1789년부터 타오르기 시작해 마침내 세상의 질서를 확 바꾸어 버린 프랑스혁명 또한 우연히 발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벌써 수백 년 전부터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 조짐은 르네상스(문예 부흥, Renaissance) 운동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강대한 로마 제국이 몰락한 5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서양 중세 사회는 철저하게 그리스트교가 지배한 사회였습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해 낸 존재로만 여겨졌고, 개인의 자유는 크게 억압을 받았지요. 학문은 오로지 신에게만 봉사했고, 예술은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중세 유럽에서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5세기경이 되자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이탈리아의 피렌체, 밀라노 같은 도시들에서 개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학문과 예술에서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되살려 답답한 중세에서 탈출해 보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 겁니다. 르네상스 운동을 주도한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데카메론] 같은 소설도 쓰기도 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은 종교적인 주제 속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내용을 함께 담은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알프스 북쪽으로 점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곧 유럽 여러 나라에서 중세 봉건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문학 작품들이 나오는가 하면, [돈키호테]처럼 중세 기사들을 조롱하는 작품들도 나왔습니다. 과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라는 태양 중심설을, 갈릴레이는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던 중세 교회의 우주관을 흔들어 놓는 것이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터는 개인의 신앙으로 충분히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던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밀었지요. 교회는 난리가 났지만, 농노제에 반대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던 많은 농민들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프랑스 태생의 칼뱅이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추진했지요. 영국에서는 로마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던 국왕 헨리 8세가 직접 종교 개혁을 추진해서 영국 국교회를 수립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교 종파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어요. 프로테스탄트란 기존의 로마 교황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이렇게 교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즉 구교와 신교로 분리되면서 유럽은 처참한 종교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몇십 년 동안이나 서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우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종교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강요하는 대상이 아니라 개인적인 양심과 신념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지요. 그에 따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중세 교회의 특권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의 주인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어 가게 된 거지요.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국에서는 17세기 중엽에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 등이 일어나 의회 정치가 도입되었습니다. 의회 정치란 의회가 국민들을 대표해서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정치 형태로 중세의 절대 왕정과는 근본 원리부터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프랑스는 18세기까지도 여전히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치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17세기 후반부터 비판적인 사상가들이 활동하면서 절대 왕정에 도전을 벌여왔습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리며 프랑스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사상적 흐름을 계몽사상이라고 하지요. 

 

‘계몽(啓蒙)’ 이라는 말은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계몽사상이란 신학과 종교적 관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 주면서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시오!’하고 일깨운 외침이랍니다. ‘신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통해 삶의 문제와 사회의 구성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계몽사상을 처음 일으킨 사람은 영국 명예 혁명기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sus)였습니다. 로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노동하여 얻은 재산을 소유하는 존재’라고 규정했지요. 그리고 개인의 재산권이나 정부에 대한 저항권의 개념도 정립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논리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생각이었습니다. 로크가 강조한 재산권과 저항권의 개념은 프랑스로 건너가서 더욱 풍부하게 발전했지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이를 자연권 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서 잠깐 자연권이란 어떤 것인지 알아 볼까요? 

우리는 흔히 실정법의 논리에 따라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정법의 논리를 떠나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은 법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지요. 이렇게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를 자연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를 자연권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 하늘이 준 권리라는 뜻에서 ‘천부 인권(天賦人權)’이라고도 합니다. 국가가 법률로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권리이기도 해요. 

 

이렇게 자연권 사상이 꿈틀거리던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계몽의 시대를 연 사람은 볼테르(Voltaire, 1694-1778)였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세련된 사상에 매료된 그는 프랑스 사회를 영국에 비교하면서 비판해 정부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는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립을 주장하며 절대 왕정을 흔들어 놓았지요. 그리고 장 자크 루소(Jaen Jaques Rousseau, 1689-1778)는 언론과 출판, 신앙과 자유를 요구하며 사회 계약설에 따른 주권 재민 사상을 펼쳤습니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의에 근거한 것이므로 나라의 주권은 민중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루소의 사상은 로크의 계몽사상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고, 더 나아가 근대 시민 시회의 기본 이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산업 혁명과 함께 성장한 부르주아 세력

프랑스혁명을 이끈 세력은 시민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의 ‘시민’이란 오늘날과는 다른 의미로 ‘부르주아,’ 즉 중산층을 의미하지요. 상인과 수공업자들, 변호사나 문필가, 중간 관리 같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했습니다. 부르주아 세력은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16세기 무렵부터 봉건제가 빠르게 해체가 되던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농민층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모직물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또 석탄이 연료로 이용되면서 대대적인 기술 혁신도 일어났습니다. 17세기말부터는 면직물 공업도 크게 일어났지요. 다시 말하면, 산업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돈을 많이 번 신흥 부르주아 세력은 점차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보다 산업화의 시기는 늦어졌지만, 프랑스에서도 중세 말부터 화폐 경제가 도입되어 상업 부르주아가 성장하기 시작했지요. ‘부르주아’라는 말도 중세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말입니다. 중세 말엽, 프랑스의 상인들은 교통의 요지에 있는 ‘부르그’라는 시설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돌며 장사를 했습니다. 한 부르그에서 장사를 한 뒤 다른 지역의 부르그로 옮겨 또 장사를 하는 식이었어요. 부르그는 점차 상인들의 본거지가 되었어요. 그러자 가난한 농민들 중 일부는 땅을 버리고 부르그 주변으로 와서 수공업을 하면서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들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성벽을 둘러쳐서 새로운 부르그를 만들었지요.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부르그의 주인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부르그의 주민’이라는 뜻으로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부르게 됐답니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은 몰락한 봉건 귀족들의 토지를 사들였고, 국왕에게 세금을 내고 영주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귀족 출신이 아니어도 돈만 있으면 영주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상업과 공업, 농업에 걸쳐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게 되었고, 그런 힘을 바탕으로 훗날 프랑스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 중심의 서양 중세 사회는 르네상스 운동과 더불어 인간 중심 사회로 변화했습니다. 또한 계몽사상이 발달하여 성직자나 귀족들이 가진 특권이 터무니없다는 인식도 널리 퍼지게 되었죠. 게다가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 특권층을 대신해서 역사 전면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 존재라는 인식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기운은 점점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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