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 1- 혁명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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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 1- 혁명 전야

by &#$@*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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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과 모순이 끓어오르던 혁명 전야

세상이 발전하면 사람들의 삶도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사회를 지배하는 제도와 사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커다란 갈등이 생겨나게 되지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부르봉 왕조가 지배하던 18세기 프랑스 사회가 꼭 그런 모습이었다고나 할까요. 당시 프랑스의 낡은 체제를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실정에 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옛 제도’라는 뜻이지요.

 

그 무렵 프랑스 사회는 왕의 권리가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과 가톨릭교회의 중교적 원리를 바탕으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공공시설 대부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신부 제도에 얽매여 있었지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인 1789년을 기준으로 보면 12만여 명의 성직자가 제1신분, 38만 명의 귀족이 제2신분, 그 밖의 2450만여 명에 다다르는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 등의 평민들은 제3의 신분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전체 구조의 2% 정도에 불과했고, 국민의 대부분은 제3신분에 속했어요. 그런데 제1신분과 제2신분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의 비율은 전 국토의 30%정도나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금은 면제받는 등 수많은 특권을 누렸답니다. 특히 상류층 귀족들은 파리 서남쪽에 있는 베르사유 궁에 모여 살면서 매일같이 먹고 마시는 화려한 파티를 벌이는 생활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제3신분에 해당하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할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인구 전체 90%에 달하는 농민들은 갖가지 세금을 내야 해서 허리가 휠 지경이었어요. 지주에게는 지대를 내야 했고, 나라에는 재산세와 병역세를, 또 교회에는 십일조 등을 바쳐야만 했지요. 이러하니 아무리 피땀 흘려 열심히 일을 해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많은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받는 임금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어요.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과 노동자들의 불만은 하루게 다르게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세력을 키워 가던 부르주아들 또한 자신들을 제약하는 낡은 체제의 모순을 절절히 깨닫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1774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부터 프랑스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습니다. 불황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우선 몇 년간 연달아 흉년이 들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당시 벌어진 미합중국 독립 전쟁을 지원했더랬습니다. 미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앙숙 관계인 영국에 대항하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고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지요. 해가 지날수록 그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1785년부터 몇 년간 한파가 몰아쳐서 식량 위기가 더욱 심각해져 갔어요. 밀과 보리 등 곡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이로 인해 도시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의 가치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파리 노동자들은 생활비 중 80% 정도를 빵 값으로만 지출해야 했지요. 이런 상황이 되자, 농민들이나 도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량 외에 다른 물품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품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상공업이 크게 위축되면서 도시에는 실업자가 넘쳐났지요. 그러자 부르주아 세력 안에서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1787년 2월에 루이 16세가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했습니다. 명사회는 귀족과 성직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왕의 자문 기관이었어요. 루이 16세가 명사회를 소집한 것은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나라 재정을 충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특권만 누려왔던 그들이 순순히 돈을 내놓을 리가 없었지요. 명사회는 자신들이 평민과 똑같이 세금을 내면 위신과 체면이 떨어진다는 아주 오만한 생각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전반적인 사회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들은 정치 문제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에는 이미 의회 정치가 확립되어 있었고, 멀리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도 미합중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연권 사상과 사회 계약설에 의한 통치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었지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를 보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각성된 프랑스 부르주아들은 왕과 특권층들이 하는 짓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금방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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