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다
명사회를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 프랑스 정부는 1788년 8월, 나라 안에서 두루 신망을 받았던 네케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고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 대표가 모두 참여하는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는 삼부회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확인받으려는 귀족들의 요구이기도 했지요. 삼부회는 1302년 필립 4세가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를 모아서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었던 회의에서 유래된 신분제 의회였습니다. 의회라고는 하지만 사실 영국의 의회와 달리 삼부회를 소집하고 안건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국왕뿐이었습니다. 그나마 1614년 이후로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어요.
1789년 5월, 175년여 만에 드디어 삼부회가 열렸습니다.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이 된 그 삼부회에는 성직자 대표 298명과 귀족 대표 270명, 평민 대표 598명이 참가했답니다. 평민의 수가 귀족과 성직자의 수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이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숫자가 별 의미를 가질 수 없었지요. 투표 방식을 1인 1표 제로 할 것인지, 부별 투표제로 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거든요. 1인 1 표제에 따르게 되면 숫자가 많은 평민이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별 투표제를 따르게 되면 각 신분의 대표자들끼리 의결을 거쳐 자신들의 입장을 정한 다음에 신분별로 한 표만 행사하게 되면 평민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랍니다.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같은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따라서 평민 대표와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일부 귀족들은 삼부회에 참가한 모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서 1인 1표에 따라 의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성직자 대표와 대부분의 귀족 대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요. 투표 방식을 놓고 서로 팽팽하게 대립한 세 신분의 대표들은 결국 아무런 타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평민 대표들은 삼부회를 무시하고 새 의회를 꾸리기로 했습니다. 이 기회에 삼부회를 아예 영국식 의회로 바꾸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1789년 6월 13일, 마침내 평민 대표들은 독자적으로 국민 의회를 결성했답니다. 이는 국왕은 물론 기존의 프랑스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가 되자 루이 16세는 평민파 의원들을 위협하며 이들이 사용하던 의사당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평민과 의원들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답니다. 6월 20일, 평민파 의원들은 의사당 대신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재정될 때까지는 절대로 국민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지요. 로크의 저항권 사상을 멋지게 실천한 이 서약을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고 부릅니다.
무능한 국왕을 미워하던 파리 시민들은 테니스 코트에서 시위를 벌이는 국민 의회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평민파 의원들의 확고한 태도와 시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제1신분과 제2신분 대표자들 중에도 국민 의회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국민 의회는 헌법 제정 의회를 결성하고 의회 정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드디어 프랑스에도 의회 정치가 도입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지요.
하지만 그 무렵 국경에 있던 국왕의 군대가 베르사유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거기에다 7월 11일에는 루이 16세가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재무장관 네케르를 파면해 버렸답니다. 뒤이어 국왕의 군대가 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려고 파리로 진격 중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은 불안감에서 분노감으로 바뀌었지요. 그렇지 않아도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된 흉년으로 굶주림에 지친 시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베르사유에서 진격해 오는 왕의 군대가 파리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주요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그때부터 파리 시내는 발칵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시위대는 ‘빵을 달라!’하고 외치며 빵집과 제분소를 습격했지요. 그리고 그동안 농민과 노동자를 수탈해 온 지주와 귀족의 저택도 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왕의 군대는 파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시위대의 기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군대에 맨손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요.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도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시위 지도자 중 한 명인 카미유 데물랭이 나서서 무기를 얻으려 바스티유 감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은 주로 국왕에게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가두어 두던 낡은 체제의 상징과도 같았거든요.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은 파리 동쪽의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몰려갔습니다. 이들을 가로막은 것은 대포를 앞세운 수비대였어요. 시민들은 수비대를 향해 대포를 철수하고 무기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수비대는 총격으로 답했답니다. 그러자 더욱 분노한 시민들은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이 감옥을 점령했지요.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말이에요.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자 파리는 완전히 시민들의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새 시장도 선출했습니다.
한편,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 뜰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게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시큰둥하게 “또 폭동이 일어났느냐?”하고 물었답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귀족이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하고 분명하게 말했지만 왕은 여전히 태연했지요. 그러다가 파리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농민들이 영주의 성을 습격하여 호적과 토지 대장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왕은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요. 프랑스 국민들의 분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국왕의 군대만으로는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지 사흘 만에 루이 16세는 파리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이 직접 뽑은 파리 시장과 마주 앉았지요. 시장은 왕에게 파리시를 상징하는 열쇠와 함께 삼색휘장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휘장에는 파리시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푸른색 사이에 왕실을 상징하는 흰색이 들어가 있었어요. 왕에게 화해를 청하는 파리 시민의 뜻이 담긴 그 휘장은 오늘날 프랑스 국기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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