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 3- 새 시대를 위한 법과 제도를 제정하다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근대의 이정표가 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 3- 새 시대를 위한 법과 제도를 제정하다

by &#$@* 2023. 3. 22.
반응형

혁명의 열기 속에서 국민 의회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법과 제도의 제정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시위가 시작된 지 약 3주 만인 1789년 8월 4일 밤, 마침내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의 특권을 모두 폐지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수백 년 간 프랑스 봉건 사회를 떠받쳐 온 제도를 뒤집어 버리는 참으로 엄청난 선언이었지요. 다만, 이 선언은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농민이 영주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주고 신분을 사야 했기 때문에 여전히 가난한 농민들보다는 봉건 영주와 지주들에게 유리한 면이 있었답니다.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의 특권 폐지를 선언한 바탕에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연권 사상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진보적인 사상을 담은 선언문을 공표하기로 했지요. 이 일에는 바스티유감옥 습격 후 파리 국민 방위대 사령관이 된 라파예트가 앞장을 섰습니다. 라파예트는 원래 귀족 출신이었지만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어서 미국 독립 정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라파예트는 그런 경험을 되살려 선언문의 초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8월 26일, 드디어 국민 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널리 알렸습니다. 

 

보통은 ‘인권 선언’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인권 선언은 전문(前文)과 17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권 선언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2조는 자유, 재산, 안전을 침해하는 압제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담고 있지요. 또 제3조는 모든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 재민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르익은 근대적인 사상들이 이 세 조항에 잘 표현되어 있답니다. 선언의 제4조부터 제9조까지는 근대 법 정신과 법치의 원리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요. 특히 제6조는 법 앞에 평등한 권리와 참정권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밖의 조항에는 표현의 자유(제10조), 언론과 출판의 자유(제11조), 사회 계약의 원리(제12조), 조세의 평등(제13조), 국민의 알 권리(제15조) 등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원리들이 꼼꼼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직만 제17조는 소유권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못 박아 두고 있지요. 자본주의적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부르주아들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겁니다. 

 

이렇듯 인권 선언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기본적 권리와 근대 시민 사회의 정치 이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후 인권 선언은 근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일대 기념비로 남아 세계 성치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 새 헌법을 만들다

당시 파리 시민들은 굶주림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대연회가 열렸습니다. 흉년이 들건 말건, 혁명이 일어나건 말건, 베르사유 궁전의 식탁은 여전히 호화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더욱이 루이 16세는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시민들의 열망을 모은 인권 선언의 승인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어요. 왕의 군대는 시민들이 전해 준 삼색 휘장을 짓밟기까지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1789년 10월 5일, 한 젊은 여성이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 북을 둥둥 올렸어요. 그리고 “빵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우리에게 빵과 자유를 달라!”하고 함께 외쳤지요. 점점 불어난 시위대는 흩뿌리는 빗속을 뚫고 왕이 머무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해 버린 겁니다. 

 

오후 늦게 베르사유 궁전 앞에 도착한 시민들은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 궁전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경비병들이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왕의 숙소를 포위한 시민들은 “왕을 파리로 데려가자!”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제서야 왕은 그때까지 미뤄왔던 인권 선언을 승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더 이상 왕을 믿지 못했지요. 그들은 망설임없이 루이 16세 일가를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이제 왕은 시민들의 포로가 된거지요.

 

시민들의 손에 끌려 파리로 온 16세는 튈르리 궁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시민들 중에는 이참에 아예 왕을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기에 루이 16세는 겨우 목숨과 왕위를 간신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국민 의회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재정 위기였습니다. 안 그래도 심각했던 프랑스의 재정 상태는 혼란기를 거치며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국민 의회는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교회와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몰수한 토지 대금의 5%에 해당하는 이자 명목으로 ‘아시냐(assignat)’라는 지폐를 발행해 주었습니다. 아시냐는 나중에 한동안 혁명 정부의 화폐로 쓰이게 됩니다. 또 국민 의회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성직자들을 국가 공무원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더불어 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실시하는가 하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하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개혁을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1971년 4월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루이 16세는 프랑스에서 도망을 치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그리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 오빠인 오스트리아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오스트리아 왕은 루이 16세의 일가의 탈출을 돕기 위해 파리에서 300km 떨어진 동쪽 국경 지역에 군대를 보내 주었습니다. 1791년 6월 21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몰래 빠져나간 루이 16세 일가는 마차를 타고 동쪽으로 줄행랑을 쳤지요. 그러나 국경 근처의 바렌에서 시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왕이 도망치다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시민들은 튈르리 궁전으로 쳐들어가서 “왕을 처단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의회에 절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공화정이란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나 대표 기관에 의해 주권이 행사되는 정체 체제를 말합니다. 절대 왕정 체제에서는 왕이 어떤 법률이나 기관의 구속도 받지 않는 절대적 권한을 갖지만 공화정 체제에서는 왕 대신 국민이 힘을 갖게 되는 거지요.

 

하지만 의회 안에는 아직도 왕정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어요. 그때 의회는 공화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거든요. 공화제를 추진하던 사람들은 1791년 7월 17일 공화정 수립을 위한 서명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귀족 출신의 라파예드가 지휘하는 국민 방위대가 집회를 짓밟아 버렸어요. 아직은 왕정을 옹호하는 입장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화파와 왕당파는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견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일은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는 일과 직졀된 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1789년 여름부터 시작된 헌법 제정 작업은 2년여에 걸친 회의를 한 끝에 영국식 입헌 군주제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결국 새 헌법은 왕의 존재를 인정해 준거죠. 그 덕에 루이 16세는 분노한 시민들의 단죄를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습니다. 입헌 군주제란 왕에게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을 허용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왕은 형식적인 존재이고 실질적인 권한는 별도의 내각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입헌 군주제에 기반한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입법 의회가 소집되고, 시민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게 됐어요. 이로써 프랑스 정치는 한 단계 도약을 이룬 겁니다. 그런데 참정권의 내용을 보면 새 헌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 헌법은 프랑스 국민을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했지요. 참정권을 가질 수 있는 능동적 시민은 일정 수준의 세금을 내는 성년 남자에게 한정되었어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에서 소외되었습니다.

 

*혁명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

봉건 시대에 억눌려 왔던 프랑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는 르쿠로 부인이라는 여성이 앞서 나섰고, 1789년 10월에 시민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쳐들어갈 때 앞장을 선 것도 수천 명의 파리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혁명 과정에서 여성들은 ‘여성 시민’이라는 존칭어로 불렸고, 남성과 동등하게 법적 권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은 ‘여성과 여성 시미의 권리 선언’을 작성해 여성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제정된 헌법에는 여성들의 참정권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에는 여성들의 권리가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 만든 나폴레옹 법전에서는 그나무 모두 삭제되고 말았지요. 결국 혁명에 앞장섰던 여성들에게 혁명의 열매는 주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혁명이 외면한 사람들은 프랑스 여성들뿐만이 아니었어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천부 인권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에는 이 사상이 적용되지 않았지요. 프랑스의 혁명의 열기가 뜨겁던 1790년, 프랑스이 식민지였던 카리브 해의 산도밍고 섬에 사는 흑인 노예들이 자신들에게도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저항하는 봉기 지도자를 잔인하게 처형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산도밍고 섬 주민들의 요구를 모를 리 없었지요.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식민지를 통해 얻는 커다란 이득을 포기하기 싫어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분노한 산도밍고 섬 주민들은 1791년 8월에 대대적인 독립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804년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아이티 공화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식민지에서 일어난 수백 건의 반란 중에서도 유일하게 성공한 독립 혁명이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