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혁명과 영웅의 탄생
2.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3. 국민 투표로 황제가 되다
4. 대륙 봉쇄령을 무시한 러시아를 공격하다
5. 엘바 섬에서 탈출한 후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화려하게 등장하기 전에 유럽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동안 전쟁을 치르는 사이 중세 시대는 저물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물결이 일어났어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부활시킨 르네상스는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했고,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지구가 돈다는 설)을 알렸고, 갈릴레이가 그 의견에 동조하다가 탄압을 받았습니다. ‘모나리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화가들은 성당의 벽과 천장에 자신들의 천재성을 뽐내는 그림을 마음껏 그렸습니다.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 땅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에 힘입어 15세기 말부터 신항로가 개척되기 시작했죠.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아메리고 베스푸치, 마젤란 같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찾아 돛을 올렸습니다. 그들이 신대륙 발견에 열을 올리고 있던 16세기 무렵,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의 신호탄을 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프랑스는 강력한 왕의 출현으로 최고 전성기를 맞이 했습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명언을 남긴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부르며 태양처럼 빛나는 베르샤유 궁전을 짓고 그곳에 들어앉아 마음껏 권력을 누렸습니다. 강력했던 프랑스 왕정은 루이 14세 말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해 루이 16세 때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혁명의 기운이 파리 하늘을 뒤덮고, 그 불길이 유럽의 다른 나라로 번져갈 무렵, 프랑스군 포병 출신의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뒤를 잇느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 보나파트르였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영웅의 탄생
나폴레옹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먼저 프랑스혁명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발원지가 바로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왕은 루이 16세였습니다. 왕비는 오스트리아 황실 가문의 마리 앙투아네트였지요. 두 사람은 모두 사치스러워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났어요. 게다가 식민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벌일 때(1775-1783년) 전쟁 물자를 대 주느라 나라 곳간이 텅텅 비고 말았습니다.
루이 16세는 바닥난 국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와 평민 세 신분 대표가 모이는 삼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왕은 이 회의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어떻게 돈을 긁어 모을까 연구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회의에서 머릿수대로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자 명민 대표들은 헌번 제정을 요구하면 국민의회를 구성했어요. 왕은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이 절대 왕정의 상징인 다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혁명의 불을 댕겼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행진했고, 교회의 토지와 귀족의 재산을 몰수 헸으며, 영주의 성을 습격해 봉건 영주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 문서를 불태웠지요. 혁명의 불길은 마침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은 나라 안팎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지요. 왕의 목이 잘렸다는 소식에 이웃 나라 왕들은 경악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 유럽 강국들은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간섭할 채비를 했습니다.
프랑스는 급진파인 자코뱅파와 온건파인 지롱드 파가 팽팽히 맞서면서 혁명 후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1795년 포병 장교 출신의 나폴레옹이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역사 무대에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원정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투에 자신이 생겼고, 야망은 점점 더 커갔습니다. 그는 보다 강한 적과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경쟁 상대는 영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세계 최대 강국인 영국을 공격하기에는 힘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먼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습니다(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 군대를 격퇴하고 여러 번 승리를 했습니다. 지상 전투에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전에서는 상황이 달랐지요. 영국의 유명한 제독인 넬슨이 이집트 해안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군대 내에서는 전염병까지 돌았습니다. 그때 파리에서 정파 간의 갈등이 심해져 나라가 몹시 혼란스럽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799년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혼란한 정국을 십분 활용해 권력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국민이 뽑은 의회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내쫓고, 자기 자신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로마 시대 최고 권력자였던 집 정권처럼 제1 통령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혁명도 끝이 났습니다.
국민 투표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는데도 프랑스 국민은 독재자인 그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현상을 프랑스 혁명 이후 10년 동안 프랑스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을 잠재울 사람으로 나폴레옹이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대문이라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폴레옹은 최고 통치자인 통령이 되고 나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일들을 많이 했지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반영하여 나폴레옹 번전을 만든 것입니다. 이 법전은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확인해 주었고,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며, 개인 소유권이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었지요.
나폴레옹은 또 인재를 고루 등용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파리 시민이 나폴레옹을 지지한 이유는 그가 전쟁에서 이룩한 승리 때문이었지요. 그는 이탈리아를 제압해 군인의 우상이 되었고, 국민들은 나폴레옹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종신 통령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1804년 마침내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요. 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국민들이 민주적인 공화적을 폐기하고 역사의 후퇴할 수 있는 제정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모두 나폴레옹이 보여 준 뛰어난 정치력과 전투력 덕분이었습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서 전 유럽의 황제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영국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에스파냐 해안인 트라팔가르로 파견했습니다. 그곳에는 영국 해군을 이끄는 넬슨이 있었습니다. 넬슨은 몇 년 전 나폴레옹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습니다.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넬슨의 지략과 용기가 프랑스 해군을 무찔렀습니다. 넬슨은 이 전투에서 총아 맞아 사망했지만 영국 해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입증해 주었습니다. 비록 해전에서는 영국에 밀렸지만 지상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을 상대할 나라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해 12월 체코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 동맹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전투에 패한 러시아는 동쪽으로 후퇴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영토 일부를 프랑스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을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해 전 유럽에 법령을 선포하면서 유럽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베를린 칙령이라 부르는 이 법령에서 한 가지 의미 있는 선언을 했죠.
“유럽의 어느 나라도 영국과 물건을 사고팔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유명한 대륙 봉쇄령입니다. 대륙 봉쇄령은 프랑스의 적국인 영국을 유럽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대륙 봉쇄령을 무시한 러시아를 공격하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을 다른 나라 국민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자기 형을 에스파냐 왕으로 만들려 하자 에스파냐 민중들이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프랑스 군이 잔인하게 진압했지만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지요.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티롤 지방의 농민들도 역시 저항을 했습니다. 또한 프로이센(오늘날의 독일)에서도 나폴레옹의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지요. 나폴레옹의 지배를 다는 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 프랑스의 혁명 이념인 자유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 운동이 크게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의 운명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여기저기서 저항이 일어나 위태롭던 터에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고 나오자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정복하려고 출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접 60 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모스크바에 입성할 즈음에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한두 차례 전투를 치르며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성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뒤이어 모스크바 교외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러시아군이 프랑스 군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주변의 시설과 자원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 원정군은 머물 곳도, 먹을 것도 없어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추위였습니다. 퇴각하던 프랑스 병사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쫓아 온 러시아 기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고전했지요. 나폴레옹은 간신히 러시아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살아 돌아온 병력이 원정대의 2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훗날 히틀러도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가 나폴레옹처럼 실패했습니다. 러시아와 전투에서 패배를 한 것이 전쟁의 패배로 이어진 것도 같았습니다.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다음 해 나폴레옹은 독일 라이프치히 근방에서 유럽 연합군에 패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엘바 섬에서 탈출 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다
나폴레옹이 섬을 탈출 한 때는 1815년입니다. 그는 병사 몇 명만 데리고 프랑스에 도착해 자기를 지지하는 농민들과, 자기와 싸우러 온 군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폴레옹을 섬에 가두고 빈에 모여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왈츠를 추던 유럽 왕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인류의 적이라 생각하고 그를 확실히 퇴출시킬 작전을 짰습니다.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군대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대가 나폴레옹 군대와 싸우기 위해 오늘날 벨리에 지방인 워털루에 모여들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군대를 이끌고 워털루로 향했습니다. 워털루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당대 최고 군사 전략가인 나폴레옹가 웰링턴이 맞붙었으니 그럴 만했지요. 1815년 6월 나폴레옹은 영국군에게 무릎을 굻어야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를 무너뜨렸고, 20여 년 지속된 나폴레옹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또다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프랑스를 떠나야 했지요. 그리고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영국의 처분에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나폴레옹을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회고록을 쓰며 남은 일생을 보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하는 동안 유럽에는 많은 변화가 왔어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성과가 나폴레옹 독재로 빛이 바랬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나폴레옹 원정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혁명 이념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지배 아래서 억압받았던 여러 나라 국민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몸소 느끼게 되었지요. 또한 유럽의 각 나라들은 나폴레옹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 싹텄는데, 이것이 국민 국가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기요틴, 한 번에 고통 없이 자비롭게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로 상징됩니다. 또 하나, 구체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프랑스 혁명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획기적인 조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요틴, 즉 단두대이지요. 기요틴은 기요탱이 고안해 만들었다고 알려지는데, 목을 가장 빠르고 깔끔하게 자르는 처형 기구로 명성이 컸습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처형 기구는 사실 사형수의 인권을 생각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합니다. 단두대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귀족 등 높은 신분은 칼로 목을 치고, 평민 등 낮은 신분은 목을 매 죽이는 교수형으로 처형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형하는 게 죽는 사람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고, 죽이는 방법이 평등하지 않다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 때 수천 명의 반역자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평등하게, 단 한 번에 자비롭게 처형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기요틴에서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아네트,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불렸던 로베스피에르의 목이 잘렸습니다.
*이집트 원정-뜻 박의 수확 로제타석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이집트 역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부하 부샤르가 나일 강 하구 로제타 마을에서 진지를 구축하다가 그리스 어와 이집트 상형 문자가 기록된 비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 비석이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 로제타석입니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비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를 포기한 뒤 이 돌은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엘바 섬에 유배당한 나폴레옹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대서양에 있는 엘바 섬에 갇혔습니다. 그를 몰아낸 유럽의 왕들이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유럽의 장래를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재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
프랑스혁명보다 100년 전에 영국이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 산업 혁명으로 완성이 되어 갔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그 의미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후 서너 차례 혁명을 일으켜 사회 변혁을 위해 노력했지요.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유럽 각 나라들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유럽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 회의에서 각국 왕들은 대체적으로 옛 왕정을 복구하는 보수 반동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를 빈 체제라고 부릅니다. 유럽에 보수적인 빈 체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프랑스 왕 샤를 10세는 1830년 7월에 자신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모여 있는 의회를 해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나 국왕 군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이에 가세해 파리 시내에 저지선인 바리케이드를 치고 샤를 10세가 내린 칙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지요. 국왕 군이 시민들을 진압하자 시위가 거세져 결국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1870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나서 이를 7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틀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7월 혁명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답니다.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루이가 왕이 되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왕정 국가였어요. 7월 왕정을 이끄는 루이 필리프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와 민중들에게 억압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중소 브르주아와 농민, 노동자들이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루이 왕이 거부하자 1848년 2월 22일 파리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3일간 정부군과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민중들의 승리로 루이 필리프가 물러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습니다. 왕정을 무너뜨린 이때의 민중 봉기를 2월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2월 혁명 결과 선거를 할 수 있는 국민은 16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늘어났지요. 그러나 국민들은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원조 나폴레옹 황제가 전쟁을 일으켜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가 경제는 좋았다는 생각한 시민들이 나폴레옹의 조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되더니 황제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다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공화정도 아니고 왕정도 아닌 제정으로의 복귀는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돌리게 되었지만,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황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1871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이후 프랑스는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을 세웠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모체로 평가받는 파리 코뮌은 70일간의 혁명 정부를 유지하다가 정부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당했는데, 드골이 국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오다가 종전 후 파리로 돌아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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