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그리스도교와 서아시아 이슬람 세력이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동아시아서는 북방 유목 민족이 몽골 대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몽골 초원에서 태어난 칭기즈 칸은 날랜 기병을 이끌고 다니며 가는 곳곳마다 승리하여 13세기 세계 지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중국 대륙을 석권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최초의 유목 민족이 되었습니다. 가장 빠른 시간 동안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몽골, 그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엉덩이에 몽골 반점을 새기고 태어나는 우리 민족에게 몽골은 그리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231년 침입을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수차례 고려를 침입해 우리 민족을 괴롭혔기 때문이지요. 우리뿐 아니라 유럽인에게도 몽골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5세기에 마음껏 짓밟았던 훈족 출신의 아틸라보다 유럽인들에게는 몽골군이 더 무자비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초원을 떠돌며 말과 양을 기르는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이동 천막에서 먹고 자며 변변한 도시나 웅장한 성이 하나도 없었던 그들이 어떻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축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몽골 제국을 창건한 테무친에게서 찾을 수 있답니다.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테무친은 아홉 살 때 이웃 부족인 타타르 부족에게 아버지가 독살되는 바람에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테무친은 케레이트 부족에게 들어가 살아야 했지요.
테무친은 훌륭한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복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먼저 케레이트 부족 안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자기 부족인 보르지기드 족을 통합했습니다. 이어 1201년 자다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무찌르고, 1203년 타타르와 케레이트 부족을 토벌해 마침내 1206년 몽골 초원을 지배하게 됩니다. 테무친은 몽골 제국을 세계사에 화려하게 등장시켰습니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죠. ‘칸’이란 몽골 초원 유목 국가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리장성을 넘고 사막을 건너다
칭기즈 칸은 가끔 만리장성을 넘어와 중국을 괴롭히던 다른 북방 민족과 뭔가 다른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을 통일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동서남북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징기스칸은 푸른 초원 위에 설치한 겔에서 작전 참모들에게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어요.
“이게 뭔 줄 아는가? 앞으로 우리가 정복할 땅이라네.”
칭기즈 칸이 첫 번째로 가리킨 땅은 중국 북부 지역에 있는 서하였어요. 칭기즈 간의 군대는 초대 불길처럼 빠르게 서하를 정복했습니다(1209년). 그후에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동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를 공경하기 시작했지요. 1214년 몽골군운 금나라 성을 포위하고 장대비처럼 많은 쏘아댔습니다. 하지만 들판을 휘몰아치면서 적을 공격하는 방식에 익숙한 유목민에게 성을 공격하는 것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칭기즈 칸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어요. 그러나 잔인하고 위대한 정복자들이 그렇듯 칭기즈 칸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1215년 다시 금나라를 공격해 수도 베이징을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중국 남쪽으로 밀어낸 뒤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힘이 약해진 금나라를 잠시 뒤로 하고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진출한 거지요. 1219년 칭기즈 칸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오늘날의 튀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호라즘을 정복하여 몽골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칭기즈 칸이 곧바로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않고 서쪽으로 진출한 이유는 물자가 풍부한 중앙아시아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칭기즈 칸은 북쪽으로 진출하여 러시아와도 전투를 벌여 몽골군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그는, 그가 죽던 해인 1227년 몽골 제국의 영토를 동쪽으로는 베이징,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부,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부의 볼가 평원, 남서쪽으로는 이란까지 넓혀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몽골군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는 놀라운 전투력과 무기 덕분이었습니다. 전투력은 말과 활에서 나왔지요. 그들은 승마 선수보다 말을 잘 탔고, 양궁 선수보다 활을 잘 쏘았습니다. 몽골군이 말과 활에 능숙했던 것은 어려서부터 늘 말을 타는 훈련을 한 덕분이었습니다. 중무장한 유럽의 기사들은, 가벼운 복장으로 날쌔게 내달리며 강한 활을 쏘아 대는 몽골군을 상대하기가 벅찼지요. 몽골 군사들은 특히 달아나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활을 쏘았는데, 이때의 파괴력은 정면에서 쏠 때보다 강했다고 합니다.
말과 활만이 아니었지요. 이들은 치밀하고 신속한 전술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몽골군은 공격 목표를 정하면 부대를 나누어 말을 타고 신속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런 다음에 한 지점에 집결하면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집중 공격하는 전술인데요. 이는 전투에서 교과서와 같은 전술이라고 합니다. 몽골군은 이 원칙을 잘 지켜 싸웠고 수많은 전투에서 효과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몽골군이 빠른 시간 안에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보여 준 잔인함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저항하는 도시를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다음 정복 예정지 주민들에게 퍼지면 몽골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문만 들어도 항복하기 일쑤였지요. 몽골군은 이런 방법으로 정복지를 빠르게 넓혀 갔습니다.
칸의 후예들 더 넓은 영토를 만들다
20여 년 동안 동서남북을 누비며 정복 사업을 펼치던 칭기즈 칸은 1227년 객지에서 병이 들어 숨지고 말았습니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 오고타이였습니다.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의 바람대로 정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고타이 칸 시절인 1231년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고려는 당시 무신 정권 시대였는데,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골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무신 정권 지배 세력이 안전한 섬에서 작전 지시를 내리는 동안 육지에서 피난 가지 못한 백성들은 몽골군의 말발굽에 잔인하고 짓밟혔습니다. 몽골군은 거란 침입 때 만든 초조대장경을 불태우고, 경주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도 불태웠지요. 몽골의 침입은 고려 정부가 항복하고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돌아오면서 멈추었습니다. 이후 개성으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한 삼별초가 항쟁했지만 고려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이 되었지요. 이로써 몽골의 침입은 끝나고, 고려는 그 후 100여 년 동안 몽골의 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고타이는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유럽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1241년에는 오늘날의 헝가리까지 침입했는데, 오고타이 칸이 죽는 바람에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때 만약 몽골군이 말머리를 되돌리지 않았다면 서유럽까지 밀고 들어가 서양 역사가 지금과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동유럽까지 진출한 몽골은 내부의 문제로 네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네 개의 제국을 한국이라 부르는데요. 우리나라의 국호인 한국과는 다른 뜻입니다. 몽골은 정복지를 네 개의 한국으로 나눈 뒤, 몽골 지역과 중국, 그리고 만주는 직접 통치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몽골이 정복지를 네 개의 제국으로 나눈 건 내분도 한 원이지만 정복한 영토가 워낙 넓어 하나의 왕조로 넓은 제국을 지배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오고타이 칸 사망 이후에도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계속해서 정복 사업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정복자는 중국을 통일한 쿠빌라이 칸이었습니다.
쿠빌라이 칸, 중국을 통일하고 원나라를 세우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1279년 중국을 통일하고 원나라를 세웠습니다. 원나라는 북방 유목 민족이 세운 최초의 중국 왕조였습니다. 몽골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은 한( 漢)족이 나라를 이어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금나라 침입을 받아 남쪽으로 쫓겨 내려간 이후 남송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이어 가다가 원나라 침입을 받아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당시 유럽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요. 마르코 폴로라는 이탈리아 인이 원나라에 머물다 돌아가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써서 원나라와 쿠빌라이 칸을 알린 덕분입니다.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 수도 베이징에 머물며 원나라 관리를 지냈지요. 쿠빌라이 칸은 원정을 나갈 때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다닐 만큼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쿠빌라이 칸은 원 제국 건설 이후에도 정복 사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274년 다시 일본 원정에 실패한 그는 1281년 다시 일본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두 번째 침공에서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인들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배를 부순 태풍을 가미카제, 즉 신의 바람이라 불렀습니다. 가미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을 공격했던 자살 특공대의 별칭으로 유명합니다.
쿠빌라이 칸의 실패는 더 있었습니다. 1281년과 1285년 남쪽에 있는 베트남을 침입했지만 베트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돌아와야 했습니다. 1286년 다시 침입해 베트남 북부 일부 지역만 차지했었죠.
몽골 정복으로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다
몽골이 정복 사업을 벌이던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어서 이미 유럽과 서아시아의 동서 교류가 빈번한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몽골이 터를 잡고 있던 중국과 중앙아시아가 하나의 영토로 이어져 동서 교류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습니다.
원나라는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역을 만들어 숙박과 말을 제공했지요. 이러한 노력 덕분에 북중국에서 러시아 볼가 강에 이르는 초원길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당나라 시대부터 유럽과 활발히 교역하던 비단길을 통해서도 유럽과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무역뿐 아니라 학문과 과학의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천문학, 지리학, 수학, 역학, 그리스도교 등이 원나라에 전해졌고, 원나라에서는 중국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화약과 인쇄술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끄는 낙타 등에 실려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원나라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 아라비아의 천문학은 이후 조선 세종 때 과학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씨 열 톨을 들여와 고려와 조선의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것도 원나라 말기였습니다.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고려는 고통과 치욕, 그리고 생활 문화의 발전을 가져온 기술과 과학을 동시에 전해받은 셈이었지요.
우리 민족에서 고통을 안겨 준 몽골이지만 세계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척 큽니다. 단순히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한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1995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신문이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꼽으면서 한 말속에 답이 있습니다.
“칭기즈 칸은 사람과 과학의 교류를 통해 지구를 좁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흔들고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쿠빌라이 칸의 인종 정책
쿠빌라이 칸은 중국의 인구를 네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고위 관리와 장수들인 최상층은 세금을 내지 않고 넓은 토지를 받았으며 중국 한족 농민들은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다음 신분층은 외국 용병이었지요. 대부분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색목인( 色目人 )이라 불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관리와 무역을 담당했어요. 이들 또한 몽골족과 마찬가지로 면세 혜택을 누렸습니다. 제3, 4 계층은 중국 민족인 한인(漢人 )과 남인( 南人)이었습니다. 다 같은 중국 민족이지만 한인은 중국 북부에 사는 중국인을 가리키고, 남인은 멸망한 남송 지역에 살았던 중국인들을 말합니다. 한인들은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각종 토목 공사에 불려 나가 일을 해야 했지요. 중국 한인들에게 원나라 지배 시대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로 남아 있습니다.
*원 제국을 상대로 싸워 물리친 베트남 왕조
베트남은 태풍 같은 것의 도움도 없이 몽골군과 싸워 이긴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베트남은 1285년부터 여러 차례 몽골군의 침입을 받았지만 대부분 물리쳤습니다. 제 아무리 용감하고 날쌘 기병이라도 베트남 정글에 들어가면 맥을 못 추었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중국 지배에서 벗어난 10세기 이후 송, 원, 명, 청 등 중국 왕조의 침략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197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세계 최강인 미국과 싸워 이겼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칭기즈 칸의 후예는 지금 뭐를 하고 있을까요?
칭기즈 칸이 대제국을 건설한 이후 13세기 말부터 14세기까지 60년 간 세계는 몽골이 시대였습니다. 이때를 팍스 몽골리카, 즉 타타르(몽골족)의 평화라고 부르지요.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팍스 로마나, 오늘날 미국의 전성기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1271년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 제국을 세운 이후 몽골은 서쪽으로 동유럽,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국 대륙을 지배했습니다. 몽골은 어떤 민족이며 어떻게 이런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요?
몽골 고원은 중국의 북쪽, 시베리아 남쪽에 위치합니다. 이곳에 기원전부터 몽골인의 조상인 유목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유목 민족은 흉노족이었지요. 흉노는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아 막으려 했던 강력한 북방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흉노에 밀려 치욕적인 형제 관계를 맺어야 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을 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흉노를 경계했습니다. 이후 한 무제는 흉노와의 협정을 깨고 대대적인 흉노 정벌에 나섰고 결국 흉노는 몽골 고원을 떠나 서쪽으로 쫓겨 갔습니다.
흉노 이후 눈에 띄는 유목 민족은 돌궐 족 이었습니다. 돌궐은 흉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6세기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받은 후 동서로 분열합니다. 서돌궐은 이후 서쪽으로 이동해 훗날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건설합니다. 거란도 몽골계 유목 민족인데, 몽골 고원과 만주 서쪽에 자리 잡고 살면서 916년 대거란을 세우고, 발해를 멸망 시킨 나라로 유명합니다. 고려에 세 차례나 침입해 우리 민족과도 악연이 깊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운 뒤 훗날 금나라에 멸망당합니다.
금나라를 멸망시키며 동아시아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한 민족이 바로 몽골 고원에 살던 몽골 민족입니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했지만 100년이 못돼 중국 한족 출신의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 쫓겨 몽골 고원으로 돌아갑니다. 몽골 고원으로 쫓겨 간 몽골을 북원이라 부릅니다.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로 분리해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은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21년에는 2차 혁명을 일으켜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합니다. 이때 내몽골 지역은 중국에 속해져 오늘날 중국의 내몽골(네이멍구) 자치로 편입됩니다.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가 된 몽골은 소련 사회주의가 해체된 이후 1992년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해 민주 공화제 국가로 탈바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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