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복자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던 14세기 무렵에 유럽의 서쪽에 위치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두 나라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거의 100연 넘게 전쟁을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전쟁을 백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백년전쟁은 100년 동안 줄곧 전쟁만 한 것은 아니었지요. 싸우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보낸 시간이 100년인 것입니다. 이 두 나라는 왜 100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전쟁을 하게 된 것일까요?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에 영국(잉글랜드 왕국)이 참견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왜 남의 나라의 왕권 문제에 끼어들었을까요?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이 죽었으니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당연했지요. 그런데 죽은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촌 동생인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버 해협 건너편에 있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요. 왜냐하면 그는 샤를 4세의 조카이므로 필리프 6세 보다는 자신이 더 가까운 핏줄이므로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 왕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요.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다른 나라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프랑스 왕족이 영국 왕이 프랑스 왕까지 한다는 것을 순순히 왕위를 내어 줄 리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왕은 생각해 볼 가치가 없는 이야기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심기가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고,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발단은 왕위 계승 문제였지만, 사실은 경제문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만 가지고 백년전쟁의 원인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모든 전쟁의 배경이 그러하듯 백년전쟁도 겉으로는 왕위 계승 문제인 것 같지만 숨겨진 의미는 따로 있었던 것이지요.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두 나라는 충돌이 생길만한 요소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당시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에 관한 문제였어요. 플랑드르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었지만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양모 산업이 번창한 플랑드르에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프랑스가 플랑드르를 차지하기 위해 간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나라의 사이가 벌어지지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왕이 죽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왕위 계승권에 간섭을 하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당시 국력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5배 정도 강했습니다. 경제 규모나 생활 수준도 프랑스가 더 나았지요. 게다가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투력에서는 영국도 프랑스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었지요. 백년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따금 맞붙은 해상 전투에서 영국은 한 수 우위를 보여 주었습니다. 더구나 영국군은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m 길이의 긴 활이었지요. 영국 활은 400m 앞에 있는 기사의 갑옷을 뚫을 만큼 정확하고 강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석궁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발사 시간도 빨랐어요. 상황이 이러하니 국력이 약한 영국이 선전 포고를 한 것이 무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다
백년전쟁 초반에 도버 해협에서 몇 차례 해상전을 펼치던 영국과 프랑스는 1346년 드디어 크레시에서 크게 한판 싸우게 되었습니다. 크레시 숲에 영국군을 배치한 에드워드 3세는 말을 타고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최전방 우익에 아들인 흑태자(블랙 프린스)가 듬직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흑태자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전투를 해서 흑태자로 불렸습니다. 프랑스에서 워낙 잔인한 행동을 많이 해서 프랑스 인이 잔인함을 비꼬아 그에게 흑태자란 별명을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영국군 진영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 군대가 사정거리에 이르자 노련한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영국군 궁수들이 쏜 화살은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에게 정확히 꽂혔습니다. 그러자 프랑스군으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영국군 진영에서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화살에 이어 천둥소리를 내며 대포가 발사되자 프랑스군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대포가 중요 전투에서 사용된 건 크레시 전투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집니다.
영국군의 활에 당하고, 대포 소리에 놀란 와중에도 프랑스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지요. 용감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무리한 진격은 프랑스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찌른 영국군은 프랑스 북부에 있는 칼레를 함락시켜 전투를 끝냈습니다. 영국은 크레시 전투에 승리해 유럽에서 가장 주도적인 군사 국가로 등장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민 영웅 잔 다르크 등장하자 전세가 역전되다
크레시 전투 이후 전쟁은 잠시 주춤한 듯 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모두 내란과 반란으로 혼란스러웠고, 1347년부터 유럽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죠.
1396년 두 나라는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전세가 불리하던 프랑스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뒤 영국군이 다시 프랑스를 공격해 전쟁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1451년 프랑스와 영국이 맞붙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의 활에 대비해 쇠로 만든 비늘 갑옷 대신 두꺼운 판금 갑옷으로 바꾸어 무장을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영국군은 파리 등 대도시를 제외한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아쟁쿠르 전투 이후 몇 년 동안은 수도인 파리를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 거의 항복을 받아낼 즈음에 프랑스 왕자 샤를 7세는 루아르 강 남쪽으로 도망갔습니다. 프랑스의 앞날은 암울했지요.
그런데 그때, 위기의 프랑스를 구원할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처녀 장군 잔 다르크이지요. 그녀의 등장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1429년 어느 날, 열일곱 살 시골 처녀 잔 다르크가 샤를 왕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천사가 자신에게 나타나 영국군에 포위된 오를레앙 시를 구하고 왕자를 왕으로 즉위시키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자는 뜬금없이 나타나 꿈 이야기를 하는 시골 처녀가 못 미더웠지만 마땅한 해결책도 없어 그녀에게 군대를 내주었습니다. 오를레앙마저 정복당한다면 프랑스는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에요.
잔 다르크가 나타나기 전 프랑스 군의 사기는 거의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를 구할 장군이 온다는 말에 병사들의 사기는 한껏 높이 올라갔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예언대로 오를레앙 전투에서 영국군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갑옷을 입은 잔 다르크가 나타나면 영국군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합니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한 잔 다르크는 샤를 왕자를 왕위에 오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1년 뒤 잔 다르크는 전투 중 부로그뉴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영국군에 넘겨졌습니다. 부르그뉴는 원래 프랑스에 있는 지역인데, 백년전쟁 당시엔 영국군 편을 들었던 거지요.
영국과 프랑스 전쟁 이후 서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다
잔 다르크가 화형된 뒤에도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전세를 역전한 프랑스군은 영국군 점령 아래 있던 도시들을 하나씩 되찾기 시작해 1453년 마침내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을 물리쳐 백년전쟁의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북부 도시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의 거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프랑스 땅에서 일어난 만큼 피해는 무척 컸습니다. 게다가 전쟁 기간 동안 고용했던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못해 이들이 도적 떼로 변해 한동안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상비군을 보유하게 되어 군사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지요. 영주들이 왕을 중심으로 뭉쳐 왕권도 강화되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프랑스인 사람들은 자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영국도 피해가 무척 컸습니다. 도버 해협 연안에 있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영국 영토를 모두 잃어 대륙의 지배권을 상실했습니다. 또한 백년전쟁 이후 제후들 사이에 전쟁이 영국은 극심한 혼란기를 보냈습니다. 영국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백년전쟁의 패배와 바로 이어진 귀족 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프랑스와 싸우면서 대륙에 대한 섬나라의 열등감을 떨쳐 낼 수 있었습니다.
백년전쟁은 중세를 마감하는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는 백년전쟁 와중에 왕의 힘이 강해지는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었고, 서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 이후 유럽 사회는 중세의 모습에서 벗어났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가 부활하고, 인간다운 삶과 자유로운 개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대항해 시대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딘 이후 호기심과 욕심 많은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황금과 향료와 차와 감자를 들여와 유럽사람들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전쟁보다 더 파괴를 불러온 흑사병
1347년부터 1351년 사이에 페스트로 불리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흑사병은 인류가 겪은 전염병 중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쥐벼룩이 옳기는 이 전염병이 유럽에 퍼진 것은 몽골족의 한 종족인 타타르족이 크림 반도의 도시를 공격하다가 군사들 사이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자 죽은 병사들을 성벽에 버리고 물러간 후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투에서 철수한 이탈리아 병사들이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전염병이 번져 수많은 유럽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트 균에 감염되고 약 6일 간의 잠복기가 지나면 환자는 흉부 통증, 기침, 각혈, 호흡 곤란, 고열로 고통을 받다 끝내 의식을 잃고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 생기는 피부의 검은 반점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부릅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2천만 명이 넘는 유럽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의 최후는 어떠했을까요?
영국군에 넘겨진 잔 다르크는 종교 재판에서 마녀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군과 싸워 이긴 그녀가 마녀로 누명을 쓴 것이지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서 그런 것이었는지… . 영국군 입장에서는 거의 이길 뻔한 전쟁을 그녀 때문에 망치게 되었으니 그녀를 마녀로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잔 다르크는 마녀 판정을 받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왕은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후 잔 다르크가 맹활약했던 오를레앙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축제가 생겨났고, 1920년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성녀로 시성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잔 다르크는 승리에 대한 확신과 솔선수범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애국 소녀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대결, 장미 전쟁
1455-1485년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영국 귀족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 장미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장미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쟁의 양축이었던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각각 문장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장미 전쟁 결과 랭커스터 계의 백작인 튜터가 왕위에 올라 튜터 왕조가 성립되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백년전쟁 이후 영국은 계속 혁명 중…
오늘날 혁명 하면 대개 자유 평등 박애로 상징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을 누리던 루이 16세와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보다 먼저 영국에서 이미 정치 혁명이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00년 먼저 영국에서 일어난 혁명을 명예혁명이라 부릅니다. 명예혁명은 앞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과 그 맥이 닿아 있지요.
영국은 백년전쟁 이후 절대 왕정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와 함께 부유한 지주 출신의 법률가, 의사 등 전문직 상류층인 젠트리(영어의 젠틀맨은 젠트리에서 유행함)가 성장해 의회 다수파를 형성했습니다. 또한 상인과 제조업자 등의 시민 계급도 성장했지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영국 왕인 찰스 1세는 의회 승인 없이 과세하고, 청교도를 박해했습니다. 청교도는 순결한 신앙과 근면 검소를 목숨처럼 여기며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비판적인 신앙들이었습니다.
찰스 1세의 독재에 대항해 의회가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권리 청원을 하자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이때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란이 벌어졌는데, 의회파가 왕당파를 격파하고 찰스 1세를 처형했습니다. 이것이 1649년 일어난 청교도 혁명입니다.
청교도 혁명 이후 공화정이 실시돼 영국은 지구촌에서 가장 먼저 왕이 없는 나라가 되었지요. 그러나 청교도 혁명을 이끌던 크롬웰이 죽고 난 뒤 크롬웰의 독단에 불만을 품었던 영국인들은 다시 왕정을 선택했습니다. 이때의 왕정 복구 이후 영국은 오늘날까지 왕이 존재하는 입헌 군주제(헌번 체제 아래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 존제로 남고 의회가 국정을 이끌어가는 제도)의 대표 국가로 남았습니다.
왕좌에 올라선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가 여전히 독재 정치를 펼치자 의회는 그를 추방하고, 새 왕에게 권리 장전을 승인받아 입헌 군주제의 토대를 닦았지요. 이것이 바로 1689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입니다. 명예혁명으로 국왕의 권한은 축소되고 의회의 권한은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여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 책임제를 실시했습니다. 영국의 내각 책임제는 근대 의회 민주주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정치와 사회가 안정 되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또 하나의 혁명인 산업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했고, 가장 많은 식민지를 확보해 싼 값에 원료를 수입할 수 있었고, 식민지 시장에 상품을 내다 팔아 부를 축척했습니다. 또한 면직기와 방적기 등 면직물을 짜는 새 기계가 발명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이어지는 혁명 3종 세트를 이루어 낸 영국은 18세기 이후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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