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은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용병 출신의 오도아케르에의 멸망합니다.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이슬람 세력에 멸망할 때까지 1천 년 역사를 이어갑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하기 전인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합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과 함께 서구 문화의 바탕을 이루게 되는데, 이 종교는 종교와 문화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럽 사회와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이 벌인 십자군 전쟁이지요.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 시작해 13세기까지 약 20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로마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볼까요?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회의에서 십자군 전쟁의 포문을 여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여러분, 신성한 땅 이스라엘이 지금 무슬림(이슬람 교도)에게 능욕당하고 있습니다. 서유럽의 왕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우리의 성지를 탈환해야 합니다. 이 전쟁은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서 죽는다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자, 죄 있는 사람들은 어서 전쟁터로 나가 싸웁시다.”
오늘날 십자군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교도들을 죽인 십자군의 행동은 옳지 않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의도는 순수했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이 과연 순수한 전쟁이었는지는 당시 전쟁이 벌어진 상항을 파악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11세기 유럽과 서아시아의 정치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서유럽에는 그리스도교 국가들, 예를 듦면 오늘날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있었고, 그리스와 동유럽 땅에는 역시 그리스도교를 믿는 동로마 제국이, 그리고 서아시아에는 이슬람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에 있던 말라즈기르트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무찌른 일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가까운 콘스탄티노플를 근거지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서유럽 왕들에게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튀르크 군대를 막아 달라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를 되찾자며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앞서 소개 한 연설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를 되찾아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유롭게 성지 순례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숨은 의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내세운 명분이 그럴 듯 했는지 서유럽은 금세 전쟁 분위기로 달아올랐습니다. 너도나도 전쟁에 나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원정군에게 입힐 군복이 모자라 집에서 대충 만든 옷에 십자가 모양의 수를 놓은 옷을 입고 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황이 내세운 명분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지요.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자는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의 성지만은 아니라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공동 성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을 차지하고 있던 셀주크튀르크는 그리스교도인들이 이스라엘을 순례하는 것을 그리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자는 교황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일 뿐이었지요. 진짜 이유는 교황의 힘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서유럽은 교황과 황제가 심심치 않게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어느 때는 황제의 힘이 더 셌다가 또 어느 때는 교황의 권한이 더 강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1076년 일어난 카놋사의 굴욕 사건입니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교황과 황제의 힘겨루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인 동시에 교황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러한 교황의 권위를 더더욱 강화할 셈이었지요.
십자군 전쟁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인구도 함께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땅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비잔티움 제국에서 도와 달라는 요청이 왔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러한 서유럽의 내부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십자군 원정 계획을 세웠습니다. 겉으로는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을 내세우고 말이에요.
제1차 원정군의 이스라엘 점령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을 내걸고 원정군을 모집했습니다. 그러자 땅이 없어 힘들어하던 기사들과 , 정말 전쟁터에 나서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신실한 신앙인들, 그리고 미지의 땅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투기꾼들이 원정군에 가세했습니다.
정식 십자군이 원정에 나서기 전인 1095년 한발 앞서 원정에 나섰던 군중 십자군(소작농 부대)은 튀르크군에게 거의 전멸당했습니다. 그 뒤 1096년 유럽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제법 군복과 무기를 갖추고 원정에 나섰는데, 이들을 제1차 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대의 규모는 기사 3000명과 보병 1만 여 명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리스를 거쳐 니케아 제국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에데사와 안티오키아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십자군이 보여 준 만행은 과연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무자비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적군뿐 아니라 성안에 있는 민간인과 같은 그리스도교인들까지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한 병사는 “이스라엘에 입성한 십자군 병사들은 솔로몬 신전까지 들어가 무슬림을 모두 죽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또 “십자군 병사들은 복사뼈가 피에 잠길 정도로 대학살을 자행했다.”라고 또한 말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고 소아시아에서 이스라엘에 이르는 지역에 네 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웠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내부 분열과 지도자 부재 때문에 십자군에게 패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127년 지도자 이마드 에든 딘 잔기가 이슬람 세력을 규합하면서 시리아 북부를 탈환하고, 1144년에는 에데사를 되찾았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서유럽은 제2차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의 성패를 가른 하틴의 뿔 전투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였습니다. 이슬람 지도자 누르 에드 딘은 십자군 원정대를 제압하고 내친 김에 이집트까지 진출했습니다. 그의 후계자 살라딘은 그리스도교의 교황에 해당하는 칼리프에 오른데 이어 황제에 해당하는 술탄이 된 뒤 십자군 원정대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1187년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 중간 지점인 이른바 하틴의 뿔에서 십자군 원정대를 만났습니다. 하틴의 뿔 언덕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살라딘은 십자군을 포위하고 비 오듯 화살을 퍼부어댔습니다. 십자군도 필사적으로 이슬람군과 싸웠지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용맹한 이슬람 군사 하나가 십자군 진영을 뚫고 들어가 주교를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살라딘의 군사들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십자군 병사들은 전투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승리한 살라딘은 두 달 뒤 이스라엘을 정복해 빼앗겼던 성지를 되찾았습니다. 이슬람군에 패한 십자군은 제3차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번 원정대는 서유럽 최고 정예 부대로 원정대를 꾸렸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사자왕이라 불리는 리처드 1세가 나서고, 프랑스는 존엄왕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은 프리드리히 1세가 원정에 나섰습니다. 먼저 출발한 프리드리히 1세가 소아시아에서 뜻하지 않게 사망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함께 이스라엘로 진격했습니다. 두 사람은 1191년 이스라엘 근처까지 밀고 들어갔지만 분열이 일어나 필리프 2세는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리처드 1세도 귀환하기 위해 살라딘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들이 자유롭게 성지를 순례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내가 너그럽게 돌아가 주겠다.”
이에 살라딘은 너그럽게 제안을 받아들였고, 리처드 1세는 돌아갔습니다.
십자군은 그 후로도 7차까지 원정을 시도했지만 성지 탈환에 실패하고 예루살렘은 약 80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점령 아래 있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 결과-중세 유럽의 몰락
십자군 전쟁은 유럽 입장에서는 원정이지만 이슬람 세력이 볼 때는 침략이었지요. 그 전쟁이 치뤄지는 동안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벌어진 소년 십자군 사건입니다.
소년 십자군 사건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어느 양치기 소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소년을 따라 수천 명의 소년들이 이스라엘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도착하기도 전에 배에서 폭풍을 만나 죽고, 일부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200여 년 동안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무척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교황의 힘이 약화되었습니다.
교황이 나서서 전쟁을 벌였다가 실패를 했으니 권위가 떨어진 것은 당연합니다. 반대로 유럽에서 왕의 권력은 강화되었습니다.
또 하나, 십자군 원정에 나섰던 봉건 기사들도 몰락하였습니다. 봉건 기사의 몰락은 물론 화약 무기인 총과 대포가 등장하면서 창과 칼을 주 무기로 삼던 중세 기사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도 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또한 동서양 세력 사이의 교루가 활발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동안 유럽과 서아시아를 오가는 상인들이 무역을 벌였기 때문이지요. 이런저런 결과가 더해져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세계는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고, 왕의 권위가 강해져 점차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교황이 황제에게 “꿇어!” 카놋사의 굴욕 사건
10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황제에게 폐위될 운명에 처하자 자신이 폐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의 카놋사 성에 머물던 교황을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황제 하인리히는 사흘 동안 눈 속에서 굴욕적으로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결국 교황이 하인리히를 용서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 사건이 있은지 20여 년 뒤 시작되었습니다.
* 전쟁과 종교의 함수 관계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속내는 아니라 할지라도 명분은 그랬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종교를 구실 삼아 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종교 전쟁이 30년 전쟁입니다(1618-1648년). 30년 전쟁은 당시 독일 연방인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프라하에서 신교도들이(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만든 개신교)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 스웨덴이 참여하고, 구교인 가톨릭교도를 돕기 위해 에프파냐(스페인)가 참전했습니다. 프랑스는 구교 국가였지만 에스파냐와 경쟁 관계여서 독일 내의 신교를 지원했습니다. 구교와 신교 세력은 30년 동안 싸움을 벌였어요. 이 전쟁으로 전쟁의 무대였던 독일은 황폐화되고, 독일 국민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0년 전쟁 결과 1648년 페스트 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얻었고, 스웨덴은 발트해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또한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하고, 스위스도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 오늘날 유럽의 국경선이 형성되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이라크 전쟁이 제2의 십자군 전쟁일까?
2003년 3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면서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이번 전쟁은 ‘지하드(성전)’라고 맞받았지요.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이렇듯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충돌한 종교 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배경이 대단히 복잡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보유 중인 재래식 대량 살상 무기가 중동의 평화와 세계 안보를 위협하므로 그것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미군은 최첨단 전투기를 이라크로 보내 바그다드 군사 시설을 거의 파괴하고, 사담 후세인 독제 정권을 무너뜨려 전쟁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전쟁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 살상 무기를 발견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아닐까라고 의심을 했지요.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미국이 그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하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미군은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애초에 그것이 목표도 아니었지만,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 안정적으로 석유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 그곳에서 벌어진 상황은 미국과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2011년 미국은 전쟁을 끝내고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습니다.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도 제거했기에 미군을 희생시키며 더 이상 이라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미군이 물러난 이라크에서 이슬람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이 격렬해 지는 가운데 알카에다보다 더 강력하고 잔혹한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등장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이슬람 시아파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외국인 인질을 살해하는 자연을 인터넷으로 중계해 전 세계 사람을 경악하게 만든 이슬람 국가, 즉 아이에스(IS)라는 조직이지요.
IS는 이슬람 무장 단체 알케에다의 이라크 지부에서 출발했습니다. IS는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의 혼란과 이웃 나라 시리아에서 벌어진 내전의 혼돈 속에서 세력을 성장시켰습니다. 이들은 석유를 팔아 마련한 많은 군자금과 예전에 이라크에 미군이 지원해 준 무기를 빼앗아 상당한 군사력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IS가 내세운 목표는 초기 이슬람 사회를 복원하는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에 빼앗긴 이라크 정권을 탈환하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알려졌지요.
이라크에서 철수한 이후 중동 문제 개입을 자제해 온 미국은 2014년 IS를 제거하기 위한 군사 개입을 선언했습니다. 10여 년 전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며 시작한 이라크 전쟁이 결국 IS라는 괴물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괴물을 잡기 위해 미국은 군사 개입을 선언했지요. 10여 년 전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며 시작한 이라크 전쟁이 결국 IS라는 괴물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괴물을 잡기 위해 미국은 또다시 중동의 사막으로 전투기를 파견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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