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을 무렵, 영국은 ‘해가 지지 않은 나라’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19세기의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죠. 산업 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더 많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원료가 필요했고, 그 원료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 더 큰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영국은 새로운 시장, 사실 이것은 좋게 말해 시장이지 사실은 식민지를 찾아 아시아,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영국이 유독 눈독을 들인 거대 시장 가운에 하는 중국 청나라였습니다. 청나라는 무역을 확대해 달라는 영국의 요구를 무시했지요. 그러자 영국은 청나라를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해 중국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1840년 일어난 아편 전쟁입니다. 아편 전쟁은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둘러싸고,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전쟁인데, 도대체 왜 영국은 아편 대문에 전쟁을 일으킨 걸까요?
아편 전쟁은 홍차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홍차를 즐겨 마셨지요. 이 홍차를 영국은 많이 수입을 한 반면, 청나라는 영국이 만든 면직물과 모직물을 조금밖에 수입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홍차를 사 올 때 은화를 주고 사 왔습니다. 21세기 미국 달러가 국가 간의 거래에 사용되는 것처럼 그 당시에는 은화를 사용하였습니다.
홍차 수입이 점점 늘어나자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은화가 청나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러다가는 영국에 있는 은화가 바닥이 날 지경이었어요. 은화가 바닥이 나면 오늘날의 외환위기를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어려움을 겪게 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청나라에 특사를 보내 광저우 한 곳에서만 무역을 허가하지 말고 조금 더 많은 곳에서 보다 많은 종류의 물건을 거래하자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청나라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물건을 사서 유통시킬 여유가 없으니 특별히 자신들이 특별히 정해 준 무역항에서 계속 무역을 하도록 허락해 줄 테니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고 했지요.
영국 왕실과 의회와 제조업자와 무역 상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역 적자를 없애야 하는데 중국이 저렇게 나오니 참 난감한 일이었지요. 가뜩이나 산업 혁명으로 마구 쏟아지는 물건을 내다 팔 시장이 필요한 마당에 최대 시장으로 생각하고 있던 청나라에서 무역 적자를 내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갔지요. 하지만 영국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로 이민 가 원주민인 인디언을 내쫓고 아메리카 식민지를 건설한 나라, 인도를 손에 넣어 공업 연료를 확보하고 다시 그곳에 물건을 내다 파는 나라,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영국은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약의 일종인 아편이었습니다.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아편은 청나라가 이미 조금씩 수입하던 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편 무역은 나라의 허가를 받고 하는 무역이 아니라 몰려 들여오는 밀거래 무역이었습니다.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몰래 팔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아편을 무척 좋아했지요. 1830년대 청나라 인구가 4억 정도였는데, 아편 중독자가 2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아편 수요가 늘어나자 청나라는 거듭 아편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편 중독자는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농민, 정부 관리, 군인,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도 아편에 중독되어 가는 상황이었어요.
청나라에서 아편이 인기를 끌고, 마침내 홍차를 수입하는 양보다 청나라가 아편을 수입하는 양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아편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나라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지고, 은화가 영국으로 밀물처럼 빠져나가자 나라 살림은 어려워지고, 은값이 뛰어 은으로 세금을 내는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지게 되었지요. 청나라는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지요. 일부 관리는 아편을 하루아침에 근절할 수 없으므로 아편 수입을 합법화하고 아편 대신 양귀비를 재배해 마약을 만들고 군인과 공무원이라도 일단 금지시키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관리들은 아편을 끊을 수 있는 기간을 주고, 그 뒤에도 계속 피우면 엄중 처벌을 해서라도 아편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청 황제는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었어요.
그렇게 해서 아편 전쟁이 벌어지기 한 해 전인 1839년, 황제의 특별 명령을 받은 임칙서가 광저우에 파견되었다. 이때부터 아편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그것은 아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칙서는 아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편굴 운영자와 아편을 몰래 거래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눈에 띄는 아편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기막힌 소식이 영국에 전해졌습니다. 영국 의회는 더 이상 청나라에 아편을 팔아먹기 어렵다고 판단하자 중국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아편 무역을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결정에 따라 1840년 영국과 중국의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3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사이 무적을 자랑하는 영국 함대가 광저우와 텐진 등 중국 연안을 장악했습니다. 청나라는 영국 함대를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조정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영국군에 패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 청나라는 영국에 패해 굴욕적인 난징 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1842년).
영국에 패한 청나라, 홍콩을 넘겨주다
난징 조약은 왜 청나라에 굴욕적이었을까요? 조약 속에 답이 있습니다. 난징 조약으로 청나라는 영국 상인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광저우와 상하이 등 청나라의 다섯 항구를 개방해야 했습니다. 홍콩을 영국에 넘겨 그곳을 영국이 통치하도록 했지요. 홍콩은 이후 155년 동안 영국이 통치하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했습니다.
청나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영국에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아편 문제에 대해 청나라가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어요. 청나라는 조약이 이토록 불평등하고 굴욕적이었음에도 패전국으로서 어쩔 수 없이 사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아편 전쟁이 끝난 뒤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조약을 체결한 후에 영국은 청나라에 면제품을 수출했지만 청나라에서 영국산 물품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청나라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직물이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서 굳이 영국산 면직물을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영국은 아편을 제외하고는 잘 팔리는 물품이 없었던 반면, 중국은 상당한 양의 차와 비단을 팔았습니다. 영국 입장에서 보면 수입 초과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영국은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영국은 자기네 제품이 잘 팔리지 않는 이유가 내륙 지방까지 제대로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청나라에 조약을 개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영국 상품이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북쪽의 대도시를 추가로 개방하고,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며, 외국 사절이 베이징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완강히 버티며 영국 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영국은 프랑스와 미국 등 이미 중국 땅을 넘보고 있던 다른 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를 제압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시작하다
영국은 지난번처럼 무력을 사용할 빌미로 찾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애로호 사건이 터졌지요. 1856년 10월 8일, 청나라 관리가 애로호라는 배에 올라가 청나라 범죄자를 체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청나라 관리가 영국 배에 올라와 마음대로 선원을 데려간 것과 그 과정에서 영국 국기를 모독한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그 배는 청나라 사람이 소유한 배라고 해명했지요. 또한 영국 국기를 모독한 적도 없다며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영주는 그 해 12월 또다시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도 전쟁에 끌여들였습니다. 프랑스는 그전 해에 청나라에서 불법으로 포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사건을 구실로 전쟁에 가담했습나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 아래 텐진까지 밀고 들어가 결국 텐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1858년). 텐진 조약으로 청나라는 외국 공사가 베이징에 주재할 수 있도록 하며, 양쯔강 유역의 도시와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하고, 외국인이 중국 내륙을 여행하고 자유롭게 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양쯔강과 여러 항구에 영국 군함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텐진 조약은 1년 안에 수도 베이징에서 비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는 게 꺼림칙해 상하이에서 강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충돌이 벌어져 연합군 함대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은 1860년 대군을 파견하여 10월에 수도 베이징을 함락하고 결국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베이징 조약에서 텐진 조약 내용이 그대로 인정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애로호 사건이 발단이 되어 벌어진 제2차 아편 전쟁이 끝났습니다.
아편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심지어 일본까지 흡혈귀처럼 중국 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시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 영국, 아편 팔아서 산업 혁명?
수천 년 동안 지구촌에서 벌어진 전쟁은 영토, 종교, 이념, 민족 등 원인도 여러 가지입니다. 전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민족, 종교 이념이니 하면서 거창한 명분을 내걸지만 전쟁을 벌이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영국은 인도 농민에게 아편을 재배시켜 중국에 밀수출을 했지요. 아편 밀수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영국은 이렇게 번 돈으로 중국산 차를 사고 나머지는 본국의 산업 혁명 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에 불만과 분노가 쌓인 중국이 아편을 불사르자 영국이 군대를 파견해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이것이 아편 전쟁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 중국이 전쟁에서 진 후 조선에 미친 영향
두 차례의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는 것을 지켜본 조선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천 년 동안 아버지의 나라로 떠받들던 중국이 패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중국을 무너뜨린 세력이 낯선 서양 세력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낯선 세력이 조선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을 때 조선은 나라의 문을 열기보다는 쇄국 정책을 택했습니다. 1866년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대와 싸웠고, 1871년에는 미국 함대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입니다. 두 차례 서양 세력과 싸워 이긴 조선은 더욱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이웃 나라 일본의 개방 요구에 굴복해 결국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입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 뒤 조선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에 시달리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 전쟁 이후의 역사: 아편 전쟁 이후 태평천국 운동과 양무운동
아편 전쟁이 끝난 뒤, 청나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영국에 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농민들의 부담이 되었지요. 이 때문에 농민들은 더욱 살기가 어려워지고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가 1851년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입니다.
태평 전축 운동은 태평스러운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홍수전과 양수천 등은 중국 남부에서 종교 결사체를 만들어 민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고는 청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국호를 태평천국이라 청하고 14년 동안 청나라에 대항했습니다.
짧은 기간 안에 이들은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태평천국은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남녀 차별을 없애 이상 사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평천국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 세력이 악화되어 갔지요. 급기야 제2차 아편 전쟁이 끝난 1860년 이후 청 조정은 서양 열강과 연합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와 난징이 함락되었습니다. 당시 청의 실권자인 서태후는 태평천국 운동을 청에 대한 반란이라고 깎아내렸고, 훗날 신해혁명(1911년)을 일으킨 쑨원은 혁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아편 전쟁을 겪으며 청은 서양의 뛰어난 군사력을 절감했지요. 이에 따라 청나라에서는 서양의 군사와 과학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여 강대국이 돼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청은 서양의 기술 전문가를 초빙하고 근대적인 군수 공장을 설립하고, 철도와 광산을 개발하고 신식 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선발해 외국에 파견했습니다. 또한 서양의 군사 교관을 초빙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근대화된 해군을 창설했답니다. 이러한 부국강병 움직임을 양무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의식이나 제도의 개혁 없이 서양의 기계와 기술만 도입하려고만 한 것이 한계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중체서용’이라 하는데, 중채서용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유학 바탕 위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을 힘쓰자는 주장이었지요. 양무운동은 또한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도 못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뒤 과감한 개혁을 통해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결국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를 격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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