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토의 일부인 소중한 섬, 독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우리나라 국토의 동쪽 맨 끝에 자리한 독도를 만나러 가 볼까요? 우리는 왜 독도가 우산도, 자산도, 돌섬, 혹은 마츠시마, 다케시마로 불러왔는지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독도는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건 없건 독도는 항상 우리 국토의 일부였던 거지요. 하지만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독도 문제는 1952년 1월 28일 일본이 을릉도의 부속 섬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한. 일 양국 간에 벌어진 영유권 싸움입니다. 일본은 걸핏하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주장을 일부 정치인들만 펴고 있는 게 아니라 일본 국민 대다수가 억울하게 빼앗긴 자기네 땅으로 독도를 생각하고 있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런 주장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어림없는 소리! 독도는 우리 땅이야!”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은 독도를 우리 국토로 지켜 나가는 데 실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먼저 독도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울고 울었는지를 살펴보며 독도의 숨결을 느끼는 게 필요한 겁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 시대 우산국으로 불리던 때부터 마치 한 몸처럼 역사 속에서 함께 어려움을 겪어 온 사이입니다. 일본이 600년 전부터 울릉도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고, 을릉도가울릉도가 여의치 않게 되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아마 울릉도가 다르게 생각될 겁니다.
울릉도와 독도가 분명하게 우리 국토의 일부로 포함된 것은 신라시대부터라는 사실이 [삼국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전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이란 이름을 가진 독립된 나라였지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하슬라의 군주였던 이찬 이사부는 왕을 설득하여 우산국을 신라의 땅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산국으로 가려면 풍랑이 심해 동해를 건너야 했고, 동해를 건너더라도 항해술이 뛰어나고 사나운 우산국 사람들을 항복시키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망설여지고 있었습니다.
땅덩어리 크기나 사람 수로 비교하자면 우산국은 신라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사방이 바다인 섬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우산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켜왔던 것이지요. 신라의 이사부는 무조건 힘으로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꾀를 내어 싸움을 하러 갈 때 악공과 나무사자를 배에 싣고 갔습니다. 신라 쪽 사람들이 섬 가까이 다가가자 우산국 사람들은 높은 절벽에서 활을 쏘아댔고, 이사부는 악공들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모조리 밟혀 죽게 하리라.” 이 말에 우산국 사람들은 겁에 질려 항복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우산국은 신라에 넘어가게 된 것이지요.
우산국은 신라에 항복을 하고 난 후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매년 특산물을 신라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산국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우산국 사람들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여진족의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결국 우산국은 멸망하고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다와 싸우며 스스로 강하게 지켜온 우산국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울릉도와 독도 구석구석에 살아남아 있을 것입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고 난 후 울릉도와 독도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차 잊히게 됩니다.
섬을 비우라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대하거나 육지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울릉도로 도망쳐 들어가 살았습니다. 1417년 태종은 울릉과 우산, 두 섬을 비우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육지로 데리고 나오게 하여 섬에 사람이 살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이른바 공도 정책이 시작된 것입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게 되면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것이고, 이로 인해 강원도에까지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판판한 것입니다. 이제 울릉과 우산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왜구들은 그 틈을 타 섬 근처에서 마음껏 고기잡이를 하며, 섬을 차지할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섬이 크고 비옥하여 마을을 이루어 살 만하다고 본 것이지요. 왜구들은 조선에서 공도 정책을 펴는 사이 자기들 마음대로 섬을 들락거리며 나무도 베어가고 고기도 잡아갔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으니 이를 항의할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의 관리들은 일본과 맞부딪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본토에서는 물러가지만 울릉도와 독도에는 남아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비워 둔 섬이니 꺼릴 게 없었던 거지요. 결국 1618년 일본 정부가 ‘오타니’와 ‘무라카와’ 두 집안에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허가를 내줍니다.
울릉도는 해안가를 빼고는 섬 전체가 나무숲입니다. 그 사이사이에 섬 나물이며, 취나물, 천공, 더덕을 경작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물이 풍부하여 사람들 인심이 좋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일본은 일찌감치 이를 알아챈 것일까요? 게다가 울릉도와 독도 주변은 온갖 고기며 전복이 나는 황금 어장입니다. ‘울릉도는 땅이 기름진 데다가 물이 풍부해서 숲이 아주 울창하다.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좋고 대나무와 검정 박달나무가 자라며 전복이 많이 난다.’고 알려져 있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울릉과 우산 두 섬을 비워 두었을까요? 단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동해의 작은 섬 따위가 그렇게 중요할까라는 생각과 그 섬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지의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데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에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핑계를 내세워 결국 섬을 버려둔 것이 아닐까요? 공도 정책을 펴지 않고 울릉과 우산, 두 섬에 계속 사람이 살게 했다면 오늘날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주장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관계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정작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것은 조선의 왕과 관리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땅, 하늘, 바다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안용복입니다.
안용복 장군 중혼비
울릉도에 사람이 많이 살았을 때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땅한 병원도 없고, 아이들 교육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섬을 떠난다고 합니다. 울릉도 사람들에게는 안용복 장군 이름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요. 울릉도와 독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인 안용복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 기록은 워낙 왕 중심의 기록이다 보니 상민이었던 안용복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안용복은 원래 경상도 동래가 고향이었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농사짓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사는 왜관에 가서 일본 말을 배웠고 오늘날 해군과 비슷한 수군에 입대했습니다. 훗날 어부 생활을 하며 박어둔과 함께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습니다. 그는 울릉도를 우리 땅으로 지켜낸 사람이니 울릉도 사람들에게는 은인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섬의 주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즈음에 조선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인들이 노골적으로 울릉도과 독도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가거나 어업을 했습니다. 당시 울릉도와 독도를 침략하기 위해 일본이 거점을 삼았던 곳은 대마도였습니다. 안용복은 일찍이 왜구가 동해에 나타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던 중 1693년 안용복은 박어둔과 마흔 명 정도의 어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울릉도 근처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인도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어부들은 1618년 일본 정부가 허가를 ㄹ내 준 후 울릉도와 독도 주변에서 마음껏 고기잡이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직접 본 안용복의 두 눈은 불타올랐습니다. 감히 남의 나라에 까지 와서 고기잡이를 하는 일본 어부들에게 따지면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실랑이는 곧 큰 싸움으로 번질 기세였습니다.
일본 어부들에게 만일 일본 정부가 허가를 해 주었다면 허가장을 가지고 보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허가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안용복과 일행은 섣불리 나섰다가 큰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하였지만 그들을 따라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어부들을 따라 가 처음 도착한 곳은 오키 섬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오키 도주를 만난 안용복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울릉도를 ‘죽도’로 부르며 나라에서 허가장을 받았다고 하니 몸소 확인하러 왔소. 울릉도는 우리 땅에서 뱃길로 하루고, 일본에서는 닷새가 걸리는데 어째서 당신네 땅이라고 하는 거요?”라고 따지자, 오키도주는 막힘없는 안용복의 말에 당황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에게 허가장이 없다면서 안용복 일행을 호키 주 태수에게 보냈습니다. 호키 주 태수는 막부(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무사 정부)에 이를 알렸고, 조선과 우호 관계가 깨질까 염려한 막부의 장군은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는 서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이 서장을 받고 고국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안용복 일행을 대마도주가 대마도로 끌고 가서 옥에 가두고 심문을 했습니다. 나라에서 써 준 서장을 빼앗은 후 오히려 조선으로부터 죽도가 일본 땅이라는 서장을 받아 내려는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하지만 안용복은 당당하게 조선에서 울릉도를 비운 것은 울릉도에 사람이 살면 혹 피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그런 것이지 일본인들이 마구 들어와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나라 땅을 지키는데 관리만 나서란 법이 있느냐를 따지며, 울릉도 주변에서 나는 고기와 전복 등 모든 것은 조선 어부들의 밥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마도주는 안용복의 뜻을 꺾기 어렵다고 생각해 안용복을 동래부사에게 데리고 가서 죽도에 조선 어부들이 배를 대지 못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동래부사는 이 일을 조정(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는 곳)에 곧바로 보고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일로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서게 됩니다. 조선의 땅이 분명한데 왜구가 들락거리게 놔두자니 자존심이 상할 일이고, 또 이 일을 항의하자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나 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섣불리 따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답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울릉도가 우리나라 땅일지라도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 이제 우리 어선이 감히 일본의 땅인 죽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차후에는 어부들에게 죽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울릉도는 그 이름을 지켜 우리나라 땅임을 밝히고, 죽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여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울릉도는 우리 땅이고, 죽도는 일본 땅이라니, 섬 하나를 반쪽씩 나누자는 것도 아니라 그저 두 이름으로 서로 각자 부르자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안용복은 그때까지 옥에 갇혀 있으면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결국 옥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안용복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목숨을 내걸고 왜국에 들어가 담판을 지었건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습니다. 고문과 옥살이로 지친 안용복은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1693년 처음 일본에 다녀온 후 안용복은 196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처음에 아무런 준비 없이 일본에 간 것과 달리 이번에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벼슬아치들이 입는 관복을 갖추고 배에는 사신임을 알리는 깃발을 매달았습니다. 이번 두 번째 일본에 건너갈 때는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분명하게 되찾아 올 생각이었습니다.
오키 섬에 가 오키 도주를 만난 안용복은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나는 조선의 울릉도 우산도 감독관으로 여기에 왔소. 3년 전 막부 장군으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이라는 서장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서 아직까지 일본 사람들이 그 근처에서 어업을 하는 게요?” 어부들의 울릉도 출입을 막으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았던 오키 도주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오키도주는 이 일을 호키 주 태수에게 알렸고, 호키 주 태수는 대마도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 사이 형이 죽고 동생이 대마도주가 되어 있었어요.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조선에 돌려주라는 막부의 결정을 조선 조정에 알리지 않은 사실을 막부에서 알게 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집안이 멸망할 것을 염려하여 서둘러 안용복 일행이 조선으로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대마도에 와 있던 조선의 사실들에 막부의 결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97년 사신을 보내 서장을 통해 정식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는 답장을 써 주었는데, 여기에 울릉도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 있고, 독도는 빠져 있었습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모두 우리 땅이라는 확인을 받았는데, 그만 조정에서는 일본에 보내는 답장에 독도를 빠뜨린 것입니다. 더구나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관리 행세를 한 것을 문제 삼아 벌을 주려고 했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들어간 죄,’ ‘국경을 넘어 일본에 들어간 죄,’ ‘벼슬을 사칭한 죄’를 들어 안용복을 귀양 보냈습니다. 목숨을 걸고 두 섬을 지켜냈지만 안용복에게 돌아온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습니다. 귀양을 가면서 안용복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까요? 자신의 진심을 짓밟은 나라님을 원망했을까요? 어쩌면 왜구로부터 섬을 지켜 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위안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안용복은 조선에서 사라졌지만 그 활약상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울릉도 도동에 안용복 장군 충혼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공도 정책이 폐지되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섬 여기저기에 울릉도 개척령을 표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울릉도 개척령은 1882년 고종이 울릉도를 비워 둔 까닭에 왜구가 침입한다고 생각하여 육지 사람들을 울릉도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울릉도로 사람들을 이주시킬 때 당시 이주민들은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에서 ‘독섬’으로 불렀고, 이후 ‘석도,’’독도’로 표시하게 됩니다. 현재 울릉도에 살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이때부터 섬에 뿌리를 내려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은 섬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기 전에도 울릉도에는 조선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동남 제도 개척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하며 울릉도와 독도 룰 동시에 개척하고자 하였지만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점차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급기야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는 구실을 붙여 다케시마로 이름 붙이고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습니다. 아직도 일본 시마네 현에 가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1910년에 독도뿐 아니라 전 국토가 일본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독도 또한 우리 영토로 돌려받았습니다. 이때 일본과 맺은 강화 조약에 우리나라의 기준선으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독도가 빠져 있는 것을 가지고,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기 때문에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또한 2001년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강화 조약에서 독도가 빠진 것은 일본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쪽에 로비를 했기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
안용복과 함께 독도 역사에서 이름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홍순칠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우리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일본이 다시금 독도에 제멋대로 들어와 ‘일본국 시마네 현 다케시마’라는 팻말을 꽂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도 근처에 일본 순시선이 나타났지요. 이를 안 울릉도 주민들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나라가 전쟁 중이라 작은 섬에까지 군인이나 경찰의 힘이 미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홍순칠의 할아버지인 홍재현은 울릉도 개척 당시 섬에 처음 뿌리를 내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사람이 남달랐기에 손자인 홍순칠이 독도 지키기에 나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953년에서 1956년에 걸쳐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막아 낸 것은 울릉도에 살고 있던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 대원들이었습니다.
책임을 맡고 있던 홍순칠 대장은 울릉도에서 제일가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독도를 지키기 위해 집과 논밭을 팔아 돈을 구해 무기를 사고 사람들을 모아 독도로 향했습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원이었던 정원도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독도를 지켜내려고 했다고 증언했지요. 수비대원 34명 가운데 아직도 울릉도에 생존자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독도 의용 수비대는 1953년 5월 28일 독도에 접근하던 일본 경비정 격퇴를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독도에 침입한 일본 경비정과 순시선을 물러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일본 정부는 거세게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해 왔습니다. 한국 정부는 독도 의용 수비대가 뜻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일본 정부의 항의 때문에 난처해했지요. 심지어 국회에서 독도 의용 수비대가 ‘불법 무장단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라에서 보낸 단체가 아니며 일반인들이 무기를 갖추어 행동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홍순칠 대장은 나라에서 독도를 지켜 준다면 언제라도 독도에서 떠날 뜻을 밝혔습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독도를 지켜내던 독도 의용 수비대는 경찰에 임무를 넘기고 1956년 12월 다시 울릉도로 돌아왔습니다.
독도 박물관
1997년 개관한 독도 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영토 박물관입니다. 신라 시대부터 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된 각종 지도가 전시되어 있으며 독도 의용 수비대와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 관련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독도의 식물과 조류, 어류 등 독도의 생태에 관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독도의 면모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답니다.
독도의 이모저모
행정구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번지
위치: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92 킬로미터 (일본에서 제일 가깝다는 시마네 현에서는 약 180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지형: 동도와 서도 2개의 섬과 주변의 작은 암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면적: 가로 400미터, 세로: 400미터가량입니다.
식물: 풀도 나무도 없는 돌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쑥, 쇠비름, 왕호장근 등 50여 가지 식물들이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습니다.
중요성: 배타적 경제 수역을 인정받으면 그 안에 어업 활동, 지하자원 관리 등 모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독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배타적 경제 수역이 정해지면 독도를 중심으로 넓은 바다를 차지할 수 있고, 일본은 매우 좁아질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1998년 신 한. 일 어업 협정에서 독도를 중간 수역으로 정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각각 독도를 중심으로 한 바다를 절반씩 나누는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독도, 우리의 섬
울릉도에는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하나쯤 전설이 있고, 역사와 관련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자바위, 투구봉, 성하신당, 안용복, 투막집, 홍순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이 울릉도 곳곳에 남아 있답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그저 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생명의 불씨는 타오르고 있는 것이죠.
현재 세계지도 가운데 ‘동해’를 ‘동해’로,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시한 나라가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일본은 독도 주변이 황금 어장일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독도가 자기네 땅임을 증명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노력을 해 왔습니다. 또한 독도에서 한국 경찰이 물러갈 것과 건물을 철거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외교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무성이 앞장서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대 문헌 조사를 실시했었다고 합니다. 1998년 11월 일본 군대인 자위대가 독도를 빼앗으려는 군사 훈련을 했다고도 하지요. 2000년 당시 일본 총리였던 모리 총리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 독도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학자나 일반인들이 주 측이 되어 독도 지키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독도학회’는 독도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찾는 학술적인 일은 학자들이 하더라도, 독도를 우리 땅으로 지켜나가는 데는 국민 모두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1989년 울릉도 주민인 이덕영 씨가 중심이 되어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분들은 독도가 국제 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무, 물,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매년 독도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오고 있습니다. 독도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독도수호대는 2000년 뗏목으로 독도를 탐사하는 대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의 역사를 알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묻고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하겠지요. 독도가 우리에게 무엇이고,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입니다.
* 공도 정책
태하리 성하신당에 가면 조선 시대 공도 정책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김인우는 왕의 명을 받아 울릉도 태하리에 가게 됩니다. 울릉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 육지로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배에 태워 섬을 떠나기 전날 밤에 김인우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를 섬에 두고 가거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단지 꿈일 뿐이라고 생각한 김인우는 그냥 출발하려고 했지만 파도가 사나워져서 섬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한 소년과 소녀에게 마을로 심부름을 떠나보낸 후 몰래 섬을 떠났어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김인우가 다시 태하리에 가 보니, 소년과 소녀가 서로 껴안은 채 백골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인우는 용서를 구하려고 성하신당을 지었습니다. 아직도 울릉도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3월 1일에 성하신당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공도 정책을 두고 일본은 조선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무인도로 버려두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공도 정책이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두 섬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영토 관리 정책이었다고 지적합니다. 1485년에 나온 동랑도 중 ‘팔도총도’에 우산국과 울릉도가 우리 영토로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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