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보는 세계사: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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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보는 세계사: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

by &#$@*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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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2. 자유로운 아테네와 군대 같은 스파르타

3. 알키비아데스의 배신과 그 결과

 

힘을 모아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50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기원전 5세기 두 나라가 벌인 이 전쟁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르지요. 한때 동지였던 두 나라는 왜 전쟁을 벌였을까요? 페르시아 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림 자료: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 지도
(그림 자료: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 지도)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그리스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스 연합국의 지도 국가였던 아테네에서는 장군이자 정치 지도자인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민주 정치라는 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아테네 강의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진리란 무엇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다룬 ‘역사’를 썼지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는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파르테논 신전을 짓고, 근처 조각가들은 아테나 여신상을 신전 개막식에 맞춰 완성하느라 바빴습니다. 아테네는 이렇듯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정치와 경제, 문화에서 단연 폴리스의 지존으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리고 에게 해 건너편 소아시아 주변 도시 국가들을 규합해 그리스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한쪽 세력이 커지면 견제하려는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민주 정치니, 문화니 하며 그리스 맹주로 떠오르는 아테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폴리스가 바로 군사 강국 스파르타입니다. 

 

1.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은 당연히 아테네였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지요. 스파르타 군대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용기, 그리고 결사항전의 자세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지 않았다면 그리스의 승리도, 승리 이후의 평화도 얻기 어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마치 자기네 힘만으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찌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며 폴리스들을 규합해 델로스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동맹에 따라 델로스 섬에 군대의 공동 자금 창고를 설치하고 그 열쇠를 자기들이 관리했습니다. 그러고는 금고를 아예 아테네로 옮기고 다른 폴리스들에게 평화 유지비를 바치라고 요구했지요. 일종의 공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아테네는 이렇게 거둬들인 자금을 함대를 만드는 등 제국주의로 탈바꿈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아테네의 이런 팽창 움직임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스파르타를 자국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독차지할까 봐 불안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스파르타는 전부터 이끌어 온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재정비하기 시작했지요. 이렇게 되자 델로스는 동맹을 주도하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주도하는 스파르타 사이에는 충돌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문제는 언제, 무슨 구실로 한 판 붙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죠. 

 

사건은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섬 사이에서 터졌습니다. 케르키라 섬은 코린토스 폴리스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연히 두 도시 국가 사이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도시가 티격태격할 때 케르키라 섬을 지원하고 나섰어요. 그러자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있던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테네의 세력 팽창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스파르타는 이 일을 계기로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테네는 맞불 작전을 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해군력에서 스파르타에 앞서 있다고 판단한 아테네는 이참에 진정한 그리스의 패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 전쟁 종전 50년 뒤인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시작과 함께 델로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파 편에 붙어 전쟁에 참여했다. 마치 20세기 초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협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동맹국이 서로 짝을 이뤄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처럼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 동맹국 간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자유와 민주주의, 해군력이 강한 아테네 연합국이 승리했을까요?아니면 불굴의 용기를 미덕으로 하는 육상 강국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이 승리했을까요? 결과에 앞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도대체 무엇이 얼머나 다르기에 이토록 철저하게 대립하게 되었는지 알아볼까요?

 

2. 자유로운 아테네와 군대 같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에 살고 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인종부터 달랐지요. 아테네 인은 이오니아 그리스 인으로 자기들이 그리스의 토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 인들은 도리아 계 그리스 인으로, 그리스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인종뿐 아니라 사회 구성 체계도 달랐지요. 아테네는 다수의 시민과 소수의 지배 계급이 공존하는 시민 사회인 반면 스파르타는 소수의 지배 계급이 다수의 노예를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고향입니다. 여성과 노예와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은 한계가 있으나, 아테네 시민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토론하고 누구나 제비뽑기에 의해 시민 대표로 뽑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토론보다는 명령을, 자율보다는 규율을 강조하는 사회였지요. 스파르타 인은 태어날 때부터 60세까지 거의 평생에 걸친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런 교육을 통해 극기력과 경쟁심과 복종을 익히고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 최강 전사로 길러졌습니다.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아테네를 이끄는 페리클레스는 오히려 잘됐다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힘만 믿고 까부는 스파르타를 제압해 온전하게 그리스를 지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경제력도 앞서고 동맹국의 규모도 더 컸고, 무엇보다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에 없는 함대가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1차전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침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도시의 성벽 안에 숨어서 스파르타 군을 맞는 대신 함대를 보내 스파르타를 공격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2년 가까이 전세를 유리하게 끌고 가던 아테네는 예기치 않은 재앙으로 치명상을 입었어요. 그 재앙이란 바로 페스트입니다. 아테네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자 많은 사람이 죽고 페리클레스도 죽었습니다. 군사령관을 무려 열네 번이나 한 훌륭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죽고 페스트가 창궐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격 휴전을 맺었습니다. 

 

3. 알키비아데스의 배신과 그 결과

휴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415년 두 나라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물자 보급 기지인 시칠리아 섬을 손에 넣기 위해 2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습니다. 아테네는 군대를 이끈 지도자는 알키비아데스였지요. 그런데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화가 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가서 아테네의 공격 전략을 모두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공격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시칠리아 원정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스파르타가 공격을 시작했어요.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함대를 조성하고 아테네의 보급로인 흑해 방면을 차단하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작전은 주요했습니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군을 무찌르고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은 평화롭기는 하나 당연히 공평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아테네는 조약에 따라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파괴해야 했고, 막강한 아테네 함대를 스파르타에 넘겨주어야만 했지요. 이로써 그리스와 지중해의 패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난 건 아니었지요. 전쟁이 끝난 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었던 테바이(테베)와의 전쟁에 패해 그리스의 패권을 잃었습니다. 테바이가 패권을 차지한 이후 그리스 내에서는 크고 작은 폴리스들 사이의 내분이 이어졌습니다. 그 무렵 그리스 북쪽에 있는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쪽 지역을 차례로 통합하고 남쪽에 있는 테바이마저 격퇴한 뒤 그리스 전체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해 제국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민주 정치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 문명도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지요. 새로운 지배자인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그리스 문명과 동방의 문화가 결합한 헬레니즘 문화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아테네가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민주주의 정치 제도입니다. 2500년 전 아테네 사람들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로 국가를 운영했지요.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부족을 10개로 나누고 부족 당 50명을 제비뽑기로 뽑아 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500인의 평의회를 구성했습니다. 모든 관직도 실제적 경험이나 직업적 전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 추첨으로 선출했습니다. 이것이 아테네 민주 정치의 핵심이지요. 특이한 점은 클레이스테네스 이후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6천 개 이상이 나오면 10년 동안 외국으로 추방하는 도편 추방제를 실시했다는 겁니다. 여자와 노예와 외국인들을 제외한 아테네 성인 남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이지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와 오늘날 간접 민주주의의 다른 점은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느냐 아니면 국회의원과 대통령이라는 대리인을 선거로 뽑아 정치를 하게 하느냐의 차이에 있습니다.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제도는 우매한 대중이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우정치로 갈 가능성이 있지만, 독재자를 확실히 걸러 낼 수 있고, 부패하고 무능한 국회의원을 두고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서양 문화의 밑바탕이 된 그리스 문화

고대 그리스 문화는 오늘날 서양 문화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신화에서부터 철학, 문학, 미술, 건축, 조각 등으로 문화의 범위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 가운데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건축과 이를 장식하는 조각이 특히 발달했지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나 여신상이 건축과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지요. 아테네가 중심이 된 고대 그리스의 문화 양식은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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