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누에에서 비단으로...
2. 비단은 신의 선물
3. 정교함의 끝판왕, 피부로인
4. 인류 최초의 동서양 교역로, 실크로드
5. 하이테크 실크의 시대
1. 누에에서 비단으로...
누에는 알에서 부화해 고치를 만들기까지 30일쯤 걸립니다. 농가에서 그동안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면서 누에를 대량으로 길렀습니다. 누에 유충의 성장 과정은 5령으로 나뉩니다. 알에서 갓 부화한 유충은 까맣고 온몸에 드문드문 털이 나 있지만 머지않아 하얀 애벌레 모양으로 변하지요. 5령기에 접어들면 약 일주일 동안 엄청난 양의 뽕잎을 먹어, 부화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무려 만 배에 이릅니다. 이윽고 몸이 금빛으로 투명해지면 유충은 적당한 구석을 찾아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알맞은 장소를 찾으면 머리를 8자 모양으로 흔들면서 실을 토해 고치를 만듭니다. 누에 한 마리가 토해내는 실의 길이는 무려 최고 1,500미터에 달합니다.
공장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고치를 선별해 질이 좋은 고치만 뜨거운 물에 삶습니다. 이 작업의 목적은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고치 안에 든 번데기를 죽여 고치를 뚫고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고치실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교질(콜로이드)을 녹여 실이 잘 풀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치 표면을 빗자루처럼 생긴 기구로 가볍게 쓸어내리면 실마리가 나오는데 이 실을 계속 감아나가면 생사(자연 실)가 됩니다. 생사를 잿물 등의 알칼리성 물질과 함께 삶으면 우리가 잘 아는 새하얗고 매끄러운 명주실로 변합니다. 수고로운 공정이지만 이렇게 얻은 명주실은 윤기와 감촉은 다른 어떤 섬유와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2. 비단은 신의 선물
인류가 비단을 이용하기 시작한 때는 약 만 년 전이라고 합니다. 비단과 인간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한자에도 잘 나타나 있지요. 예를 들어, ‘서(徐)’는 누에에서 처음으로 뽑아낸 실의 끝 부분, 즉 ‘실마리’를 의미합니다. ‘기 (紀 )’라는 글자도 실마리를 발견해낸다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점차 ‘순서를 세우다,’ ‘조리 있게 이야기하다’로 그 뜻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순(純)’은 원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비단의 생사를 의미하는 글자였고, ‘소(素 )’는 물들이지 않은 하얀 명주실을 가리키는 글자였지요. ‘연(練 )’은 본래 ‘생사를 누이다,’ 즉 생사를 잘 삶아 하얗고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을 의미했는데 ‘단련하다’란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글자나 명주실과 관련된 의미에서 출발해서 점차 그 뜻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명주실은 고대인들과 이만큼이나 밀접한 관계였답니다.
3. 정교함의 끝판왕, 피부로인
갖가지 뛰어난 합성섬유를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비단은 변함없이 동경의 대상입니다. 보도라운 촉감과 반들반들한 광택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기간 사용해도 될 만큼 튼튼하고, 염료를 사용해 다양한 색조로 물들이면 아름다운 작물이 탄생합니다.
비단의 주성분은 피브로인이라는 이름의 단백질입니다. 단백질은 우리 몸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하을 하는 화합물 덩어리로, 아미노산이 한 줄로 길게 연결된 형태인데, 이 같은 사실은 비단을 연구하면서 밝혀졌습니다.
명주실은 매우 튼튼하고 오래갑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불가사의한 성질입니다. 단백질은 부패하기 쉬운 대표 물질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단백질이 주성분인 동물의 고깃덩어리를 무더운 여름날 밖에 내놓으면, 겨우 몇 시간 만에 세균이 번식해 결국에는 흐물흐물해집니다. 세균이 방출하는 소화효소가 단백질을 아미노산 단위로 분해하여 최종적으로 단백질이 이산화탄소와 물로 환원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비단은 고깃덩어리와 달리 분해되지 않으며, 수천 년이나 되는 세월에도 견딥니다. 이는 피브로인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사슬이 베타시드(β-sheet)나 베타 턴(β-turn)이라 불리는 접힌 구조를 많이 포함하는 덕분이죠. 이 구조는 풀기 힘들 뿐 아니라 소화효소의 공격에도 강하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명주실에 트립신 억제제(Trypsin Inhibitor)란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트립신 억제제는 소화효소의 일종인 트립신과 결합해 트립신의 작용을 방해합니다. 아마도 외부에서 들어온 적인 소화효소로부터 명주실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비단은 천연 방부제를 가진 셈이죠.
누에의 체내에서 걸쭉한 액체 상태인 피브로인은 누에가 입으로 토해낼 때 가늘고 길게 당겨져서 베타 시트 등이 풍부한 구조로 변한다고 추측이 됩니다. 액체 상태가 순식간에 질긴 섬유로 변하는 셈이니 꽤 불가사의입니다. 다른 여러 단백질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질긴 피브로인 섬유가 하나로 합쳐진 명주실은 같은 굵기의 철사보다 끊기 힘들 만큼 매우 튼튼합니다.
누에가 갓 토해낸 실을 살펴보면 피브로인 둘레를 세리신이라는 단백질이 감싸고 있지요. 세리신은 고치실끼리 붙게 해 고치의 형태를 유지하는 작용을 합니다.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기 전에 푹 삶는 이유는 세리신을 녹여 고치를 쉽게 뽑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세리신을 제거하면 섬유 내부에는 수없이 많은 빈틈이 생깁니다. 이 틈으로 습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비단은 흡습성이 뛰어나며, 포함된 공기가 열을 차단해주므로 보온성도 좋습니다. 비단이 아름답게 물드는 이유 또한 내부 공간에 염료가 들어가는 덕분이지요. 게다가 비단 섬유는 삼각형 모양의 다발을 이루고 있는 피브로인이 빛을 굴절 반사해 아름답게 빛납니다. 이렇듯 단순한 아미노산의 조합이면서도 명주실은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구조물이랍니다.
4. 인류 최초의 동서양 교역로, 실크로드
이렇게 멋진 섬유는 당연히 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중국의 진한시대에는 고도의 비단 제조 기술이 확립되었고, 이 기술은 이민족과의 교역에서 매우 귀중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비단 제조법을 엄밀히 관리했지요. 귀중한 비단은 여러 상인의 손을 거쳐 마침내 머나먼 로마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중국과 로마를 이었던 교역로가 바로 실크로드(비단길)입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흔히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는 ‘오아시스 길’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카자흐스탄 일대의 초원지대를 빠져나가는 ‘초원길,’ 동중국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아라비아반도로 향하는 ‘바닷길’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교역로가 완성된 셈인데, 이는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어요.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사람과 물자 간의 활발한 동서 교류가 수많은 발명과 문명의 발전을 촉진했고, 그 결과 유럽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비단은 동서 무역에서 통화 역할을 했습니다. 비단은 누구나 원하는 데다 가벼워서 운반하기도 편했으므로, 필요한 양만큼 거래할 수 있었지요. 즉, 비단은 통화의 필요조건을 중족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아도 비단은 동서교류에 크게 이바지한 셈입니다.
5. 하이테크 실크의 시대
이제 비단은 현대의 기술과도 활발히 융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재료가 ‘스타이더 실크’라 불리는 섬유이지요. 거미는 누에나방처럼 단백질성 실을 토해내는 벌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의 강도는 방탄조끼에 사용하는 케블라 섬유의 세 배로, 신축성 또한 높지요.
하지만 누에의 실인 비단과 달리 거미의 실은 실용화되지 못했어요. 누에나방과 비교해서 거미 한 마리가 만드는 실의 양이 적고, 거미는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기 때문에 대량으로 양식할 수 없는 탓입니다.
그리하여 누에나방에 거미 유전자를 이식해 명주실 대신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연구가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이 섬유가 바로 스파이더 실크입니다. 상당히 질기고 가벼울 뿐 아니라 알레르기 등도 일으키지 않으므로, 군사에서 재생 의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 응용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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