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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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

by &#$@*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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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

제국주의의 열차에 마지막으로 올라탄 일본이 조선과 중국과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넘보던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이제까지 겪어 보지 않았던 전 지구적 충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1914년 6월 28일, 발칸 반도에 있는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이 쓴 총에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어요.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을 들고, 러시아가 이에 대항해 자기편을 끌어 모았습니다. 이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철저하게 짓밟은 세계대전은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예보 사건 이전부터 세계는 이미 충돌을 예고하고 있었지요. 그날의 총성은 다만 99도의 물을 끓어오르게 만든 1도의 열이었을 뿐입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총출동한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19세기 유럽의 열강들은 선진 문물을 전해 준다는 명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파란 눈으로 불 때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적인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야만의 땅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발달된 유럽의 문명을 전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산업 혁명을 시작한 서구 열강은 더 많은 원료가 필요했고, 그 원료로 만든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림 자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지도
(그림 자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지도)

 

 

식민지 정복 선발 주자 영국과 프랑스, 후발 주자 독일의 대결

영국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식민지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자 나눠 가질 식민지가 부족해 졌습니다. 그러자 식민지들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 사람이 피자 한 판을 먹다가 피자 조각이 점점 줄어들자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꼴과 같았지요.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가장 치열하게 달려든 땅은 아프리카였습니다. 영국은 제국주의 선발 나라답게 아프리카에서 활발하게 식민지 침략을 벌였는데,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을 철도와 전선으로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고는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어요. 

 

영국에 이어 식민지 쟁탈전에서 랭킹 2위에 오른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라이벌 의식을 느낀 프랑스는 영국처럼 아프리카로 쳐들어갔습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 서쪽에 있는 알제리와 모로코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횡단하며 식민지를 넓혀갔습니다. 이것을 횡단 정책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펼쳐진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출발해 남쪽을 향해 달리던 영국과 모로코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달리던 프랑스가 수단의 파쇼다라는 곳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파쇼다 사건이라 부르는데, 이때 프랑스의 양보로 큰 충돌은 피했어요. 오히려 두 나라는 이 사건을 계기로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좋은 먹잇감이 있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자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 같은 나라들도 아프리카 사막과 밀림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뒤늦게 뛰어들어 아프리카 한 구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 집권 이 후 강력한 국가가 된 독일은 무척 서운했습니다. 독일의 선택은 두 가지였습니다. 입맛만 다시다가 유럽으로 돌아가거나, 빼앗거나 해야 하는 거였지요. 

 

독일은 빼앗는 방법을 택하고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모로코로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와 협력을 맺고 있는 영국이 프랑스 편을 들었습니다. 자칫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위기였습니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가 강력하게 나오자 독일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덕에 아프리카에서 크게 한 판 붙을 뻔한 위기를 겨우 피할 수 있었습니다. 190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모로코 사건이라고 합니다.

 

독일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제도 등을 둘러보았으나 노른자 땅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어요. 식민지를 나눠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선발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를 만들려고 해도 영국과 프랑스 때문에 하나도 되는게 없는 후발 제국주의 독일은 19세기 후반에 날카롭게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그런데 왜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아프리카나 아시아가 아니라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그것도 식민지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스트리아 때문에…?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바다 건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식민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칸 지역의 약소민족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 발칸 지역은 오스만튀르크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오스만튀르크가 점차 힘을 잃게 되자, 약소 민족들 사이에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세르비아는 1878년에 오스만튀르크로부터 독립한 뒤 같은 슬라브 민족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을 통합해 대세르비아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878년 오스트리아가 힘을 써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1908년에는 두 곳을 합병해 세르비아를 화나게 만들었지요.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더 이상 동유럽으로 확장되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수 같은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 나타나자 한 세르비아 인이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것입니다. 

그림 자료: 제1차 세계대전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사라예보 저격 사건; 출처-위키피디아
(그림 자료: 제1차 세계대전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사라예보 저격 사건; 출처-위키피디아)

1914년 오스트리아는 즉각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자 독일과 불가리아, 오스만튀르크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슬라브족 맏형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했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과 이탈리아도 독일에 맞서 참전해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습니다. 여기에 일본도 영국과 맺은 동맹에 따라 프랑스 영국 연합국 측에 가담했습니다. 

 

1915년 들어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고 파리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마른 강 전투에서 패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 독일은 바다로 눈을 돌려 잠수함을 통해 영국 상선을 공격했어요. 이때 미국인 등 10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연합국 측에 군수 물자를 제공하던 미국은 독일 측에 항의해 민간 상선은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북해를 봉쇄하자 이를 뚫기 위해 1917년 이른바 무제한 점수함 작전을 포고했습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란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출입하는 모든 선박을 격침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포고하자, 연합국 측에 군수 물자를 제공하며 이익을 얻어 오던 미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연합국 측에 참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은 독일을 궁지에 몰아넣은 결정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파리 쪽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의 가운데 쪽인 북해에서는 독일의 잠수함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독일과 러시아가 대치하고 있는 동부 전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가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와 강화 조약을 맺어 동부 전선을 안정시킨 독일은 1918년 다시 서부 전선에 총력을 이울였으나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외려 동맹국인 오스만퇴르크, 불가리아, 오스트리아가 잇따라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지요. 엎친 데 덮친 겪으로 독일 내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독일은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연합국 측과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1914년부터 4년 반을 이어 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승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국, 패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튀르크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길은 미국이 참전해 잡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미국인들을 태운 배가 독일의 잠수함에 침몰하자 전쟁에 개입한 것이지요.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을 물리치고 전쟁에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신무기 발표장이었습니다. 비록 정찰용이긴 하지만 비행기가 처음으로 전쟁에 선보였고, 독가스 같은 화학 무기가 등장했으며, 탱크와 잠수함이 투입돼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 때문에 앞선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4년 반 동안 1000만 명이 죽었고, 2000만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반면 연합국 측에 군수 물자를 제공하던 미국은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림 자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지도
(그림 자료: 미국의 윌슨 대통령; 출처-위키피디아)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미국은 이미 세계 질서를 좌우할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1918년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제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윌슨이 제시한 평화 원칙 가운데는 식민지 국가들이 자기 결정권을 가진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이 포함돼 있었어요. 이에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날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저지한 마른 강 전투와 베르됭 전투

프랑스의 심장 파리를 점령해 승리를 결정지으려던 독일군의 계획은 1914년 파리 근교 마른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 패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90만 대군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 할 때만 해도 독일군은 목적을 이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100만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은 독일의 돌파를 훌륭히 저지했습니다. 2년 뒤인 1916년 독일군은 다시 한번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으나 요새 지역인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에 저지당했습니다. 베르됭이 파리로 향하는 길목이어서 프랑스는 베르됭을 잃고 지든가, 아니면 손실을 입더라도 지키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후자를 택하고 독일군을 결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결과 독일군은 물리쳤지만 베르됭은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베르됭 전투는 전쟁의 무의미함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큰 희생을 치르고 지켜 낸 파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독일군에게 또다시 공격당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달리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 오자 숨어 있다가 항복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의 심장 파리는 독일군에 점령당하고 프랑스는 국외에 임시 정부를 두고 항전해야 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가 패배를 거듭하자 러시아 민중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러시아 혁명 결과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지요. 소비에트 정권의 수반인 레닌은 모든 전선에서 휴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이후 레닌은 약소 식민지 국가들의 자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에 희망을 안겼습니다. 다음 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 자결권을 주창해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이 해방의 꿈에 부풀었으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민족 자결권은 독일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나라의 식민지에나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종전 후 베르사유 체제와 국제 연맹을 창설하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연합국과 패전국 독일이 프랑스 베르사유에서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유럽 사회에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만들어졌는데, 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릅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승전국에는 한없이 풍성한 반면, 패전국 독일에게는 과도하게 가혹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비스마르크 때 얻은 일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넘겨주어야 했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모두 토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잠수함과 신무기는 가질 수 없었고, 군대는 10만 명 이하로 제한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1320억 마르크를 금화로 배상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은 거느리던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식민지 민족들을 다른 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게 해 주자고 했지만, 그건 패전국인 독일 식민지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지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헝가리와 체코가 떨어져 나가고, 독일 제국은 해체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발칸 지역에서 거의 모든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터키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혁명을 겪은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되었지요. 폴란드가 탄생하고, 전쟁터였던 발칸 반도에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합쳐져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었습니다. 이 연방은 오늘날 다시 여러 나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로 국제 연맹 창설을 들 수 있습니다. 국제 연맹은 전쟁 억제와 국제 질서를 잡기 위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해 만들었는데, 제창국인 미국이 불참하고, 독일과 소련도 처음에는 제외되었으며, 침략 행위를 저지할 군대가 없었으므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건 독일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토를 잃고 돈을 잃고 자존심도 잃고 군대도 잃었습니다. 그러자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너무 가혹한 조처라며 투덜대고 다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독일인은 승전국에 무척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 독일인은 그림에 다소 소질이 있고, 독일 게르만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유대인은 마치 병균이나 쓰레기 같아서 지구에서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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