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실록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을 했던 사관이 실록을 훼손하려는 잘못된 권력에 맞서 실록을 지켜내는 이야기를 권기경 님의 작품입니다. 주인공 대주는 사관으로서 어떤 정치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임금은 물론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 알았지요. 이야기를 읽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기록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 관심을 갖고,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새내기 사관이 되다
태수는 장원급제를 했는데도 춘추관 사관이 되었습니다. 춘추관 사관은 그날그날 나라에서 벌어지는 매우 중요한 일들을 빠짐없이 적어 나가는 사람이었지요. 물론 과거에서 급제한 사람 가운데 집안 좋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뽑히긴 했지만, 사관은 그저 그런 벼슬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장원 급제를 하면 그에 맞는 집현전에서의 직책 등을 맡았지만, 사관은 좀 낮은 직급이라고 동생 태호는 걱정했습니다.
태수는 관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궁궐로 들어갔어요. 궁궐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일은 기우제에 갔다 오는 일이었습니다. 태수는 붓과 수첩을 들고 인조 임금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인조가 사직단에 들어서자 쭉 늘어서 있던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어요. 태수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기우제를 지켜보았지요.
“땅의 신이시여, 곡물의 신이시여! 기나긴 가뭄으로 논밭이 타 들어가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둘레가 쥐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슬픔에 잠긴 인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태수는 기우제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과연 이런다고 비가 올까? 기우제를 지낸다고 비가 올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뭐가 있겠어? 가뭄이 들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둬야 이런 일이 안 생기지.’ 태수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같아서 기우제를 지내는 인조 임금과 대신들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때 정구가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정구는 태수와 함께 이번에 사관이 된 같은 또래 동무였지요.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지 묻자 태수는 글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정구는 자신은 글 쓰는 것에 자신이 없으니 태수의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졸랐지요. 태수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
기우제가 끝나고 태수는 사초를 쓰려고 춘추관으로 갔습니다. 사초는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사관이 적은 적으로, 나중에 실록의 바탕이 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었습니다. 태수가 혼자 조용히 사초를 쓰고 있는데, 정구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어요. “태수야, 이 이를 어쩌지?””무슨 일인데 그래?” “조금 전에 영상 대감이 주상 전하를 뵈러 들어갔어.” “뭐? 우리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전하를 만나고 있단 말이야?”태수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너는 대체 뭘 했어? 그 자리에서 말렸어야지.” 태수는 정구를 나무랐어요. “영상 대감한테 어떻게 그래? 너 그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아마 너도….” 정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수는 어느새 춘추관을 뛰쳐나갔습니다. “야, 태수야! 어디 가?” 태수가 달려갔을 때는 영상 대감이 벌써 인조 임금을 만나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태수는 몸을 곧추세우고 영상 대감 앞으로 다가갔어요.
“대감마님,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영상 대감은 태수를 아래위로 한 번 쓱 훑어 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태수는 재빨리 영상 대감 앞을 막아섰어요.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소인은 꼭 알아야 합니다.”영상 대감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태수를 노려보았어요. “네 이놈!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느냐?”하지만 태수도 꿋꿋이 영상 대감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는 영상 대감께서는 소인이 누군지 모르십니까? 소인은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야 하는 사관입니다.” 영상 대감은 태수이 꼿꼿함에 움찔했지요. 태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영의정이나 되시는 분이 어찌 사관 몰래 주상 전화를 만날 수 있답니까?” “아니, 이놈이 지금 누구 앞에서….”
영상 대감은 태수의 당돌함에 부르르 떨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태수의 말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던 것이지요. 벼슬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임금을 만날 때는 반드시 사관이 옆에 같이 있어야 했습니다.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태수는 목소리를 높였어요.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사이에 지나가던 내시들과 궁녀들이 두 사람 쪽으로 모여들었어요. 궁녀들은 태수를 바라보며 쑥덕거렸습니다. “세상에, 영의정이 한낱 사관한테 혼이 나고 있네.” “그러게. 그런데 저 용감한 사관은 누구야?” “어머 얘는, 그것도 몰라? 이번에 장원 급제한 정태수잖아.” 그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영상 대감이 태수한테 말했어요. “오늘 일을 내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가 버렸지요. 태수는 영상 대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난 그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라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임금의 잘못을 적다-
‘영상 대감은 주상 전하와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누었을까?’ 태수는 춘추관 탁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그는 어제 일로 줄곧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춘추관 사관 여덟 가운데 벼슬이 가장 높은 황처기가 들어왔어요. 그는 영상 대감한테 막무가네로 대들었던 것에 대해 꾸지람을 했습니다. 영상 대감한테 잘못 보여서 좋을 것 하나 없다고 하면서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태수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요. 법을 어긴 건 영상 대감이지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었죠. ‘음, 궁궐이 썩을 대로 썩었어. 이러니 백성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그 아우성이지.’그런 생각이 들자 태수는 못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네 뜻은 잘 알겠지만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이제 다 자넬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황처기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투로 조용히 타일렀어요. 그런데 태수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려고 일부러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아니, 그게 아니라….” 황처기는 말끝을 흐렸어요.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어제 쓴 사초를 봤으면 해서….””네?””그렇게 놀랄 것 없다. 너나 정구나 모두 사관이 된 지 얼마 안 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보려는 것뿐이다.”
황처기의 말에 태수는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초를 보여 달라니, 아무래도 뭔가 꺼림칙해.’ “뭐 하고 있어? 어서 좀 보여 달라니까.” 황처기는 태수가 꾸물거리자 다시 다그쳤어요. “싫습니다! 제 것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황 사관님께서는 자기 사초나 잘 챙기세요.”태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쌩하니 자기 자리로 가 버렸습니다. “저, 저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황처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치를 떨었어요. 태수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번엔 정구가 잡아끌었습니다. “왜? 또?” 태수는 짜증이 났습니다. “태수야, 너 정말 그 글을 사초에 실을 거야?”태수는 그제야 정구가 호들갑을 떠는 까닭을 알아차렸어요. “물론이지.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나라의 곡식 창고를 닫아 두고 있는 게 말이 돼?”
태수가 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말하자 정구가 태수의 입을 막았어요.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튼 그건 주상 전하를 탓하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아무리 주상 전하라도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남겨야지. 그게 사관이 할 일이잖아. 그래야 역사가 바로 서는 거고.” “아이고, 난 모르겠다.” 정구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품속에 품고 있던 태수의 사초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어요. “하여간 조심해. 지금 다들 널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래. 고맙다.” 태수는 정구의 어깨를 툭 쳤어요. 바로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가 잽싸게 달아났습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영상 대감은 눈썹을 추켜올렸습니다. “예,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도 곡식 창고를 닫아걸고 주상께서는 기우제만 지내고 있다고 썼답니다.” “허, 이런 괘씸한 놈을 보았나? 곧장 그 사초를 가져오너라. “안 그래도 사초를 뺏어 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영상 대감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어요. 사관 황처기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끄러미 영상 대감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조회가 끝난 뒤 인조 임금은 태수를 방으로 불렀습니다. “너를 부른 것은 내가 요즘 나를 몹시 못마땅히 여긴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이냐?” 태수는 인조 임금의 말에 뜨끔했다. ‘전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지? 설마 정구가? 아니 정구가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태수는 새삼 궁궐이라는 곳이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참말인가 보구나.” 태수는 어찔할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먼저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인의 생각은 사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오호, 그래? 그렇다면 네 생각을 알고 싶으니 곧장 가서 그 사초를 가져오너라.” 그 말에 태수는 움찔했지요. ‘어떡해야 하지?’ 잠깐 망설이던 태수는 곧 굳게 다짐을 한 듯 또렷이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뭣이? 네가 지금 임금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냐?” 인조 임금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어요. “예, 사초는 한번 기록을 하고 나면 결코 다른 사람이 보아서도 고쳐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주상 전하도 마찬가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상 전하의 명이라 하더라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태수는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슬슬 끄집어냈지요. “목숨이 달아나도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정말 두렵지 않단 말이냐?”인조 임금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습니다. “두렵긴 하지만 소인은 그저 사관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만일 소인이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오늘 일을 반드시 사초에 남길 것입니다.” 태수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 너처럼 당돌한 사관은 처음 보는구나, 껄껄껄.” 인조 임금은 큰 소리로 웃어 젖혔습니다.
-사초를 둘러싼 음모-
인조 임금과 영상 대감은 사초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상 대감이 인조 임금이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실록을 보고 뭐라고 할지에 대해 걱정했지요. 그 말에 임금은 멈칫했어요.
영상 대감은 지난번 임금께 말씀드린 일에 대해서도 물었어요. 임금은 다음 날 명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튿날 곧바로 인조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경선군, 경완군, 경안군을 탐라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태수는 임금의 명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경선군, 경완 군, 경안군 세 왕자는 죽은 소현 세자의 아들로서, 모두 인조 임금의 친손자입니다. 더구나 맏손자인 경선군의 나이가 열두 살이고, 막대 경안군은 이제 겨우 네 살이었지요. “주상 전하는 왜 그 어린것들을 귀양 보내려고 하시는 걸까?” 춘추관으로 온 정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태수는 그런 정구가 딱한 듯 입을 열었어요. “쯧쯧, 넌 어째 그것도 모르냐?” “아니, 그럼 넌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정구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태수는 하는 수 없이 지난 몇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찬찬히 들려주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전쟁에 진 조선은 청나라에 소현 세자를 볼모로 보내야 했어.”
그 뒤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 세자는 청나라에서 보고 겪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지만, 학질에 걸려 그만 나흘 만에 세상에 떠나고 말아.” “헉, 그렇게나 갑자기?” 청구가 끼어들었습니다. “응, 그래서 소현 세자가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 말에 정구는 눈을 반짝이며 의자를 바싹 당겨 다가앉으며 누가 독살을 했느냐고 물었지요. 태수는 모른 척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짚이는 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조 임금이었지요.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 갔어요. “병자호란이 끝난 뒤로 백성들한테 믿음을 잃은 주상은 똑똑한 세자를 둔 것이 오히려 늘 마음에 걸렸어. 게다가 소현 세자와ㅓ 사이가 안 좋았던 영상 대감이 그런 주상의 마음을 알아채고 끈질기게 소현 세자를 멀리할 것을 부추겼거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태수 혼자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소현 세자가 독살을 당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아무것도 안 나왔으니까. 하지만 슬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얼마 뒤 이번엔 소현 세자의 부인인 강빈이 주상을 죽이려 했다는 죄로 사약을 받고 억울한 죽음을 맞게 돼. 그것도 모자라 이제 소현 세자의 남은 피붙이인 세 왕자마저 귀양을 보내려 하는 것이지. 이는 훗날 생길지 모를 걱정거리를 미리 없애려는 주상과 영상 대감의 뻔한 속셈이 틀림없어.”태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정구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양을 떠난 어린 왕자들을 생각하니 태수는 가슴이 미어졌어요. ‘그 어린것들이 대체 무슨 수가 있다고 그런 몹쓸 짓을 한단 말인가? 내 오늘 일을 낱낱이 사초에 남길 것이다.’ 태수는 곧바로 붓과 종이를 챙겨 들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사초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날 밤 황처기가 정구를 영상 대감 앞으로 끌고 갔어요. 그러고는 태수가 사초를 뭐라고 썼는지 바른대로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정구는 한참을 쩔쩔매다가 ‘아, 가슴이 찢어질 일이도다. 어린 왕자들을 전염병이 돌고 있는 탐라로 귀양 보내는 것은 그들을 부러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 일인가?’라고 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상 대감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어요. “그 사초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 너는 머뭇거리지 말고 곧장 가서 사초를 고쳐 쓰게 하라!”하지만 황처기는 태수가 오만방자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이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고 하며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습니다.
-사초를 봉인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태수는 춘추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당직을 서는 날이라 이곳에서 밤을 세워야 하지요.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오랫동안 책을 읽었더니 눈이 침침해졌어요. 태수는 두 팔을 위로 쫙 펴서 기지개를 켜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가운 밤공기가 산뜻하게 다가왔어요.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그 길로 태수는 우물가로 가서 물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춘추관 앞마당에 들어서는데, 안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어른거렸어요. “아니, 이 밤에 누가 있지?”태수는 발소리를 죽이고 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않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은 천을 뒤집어쓴 이가 태수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들을 마구 뒤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놈이 내 사초를….”태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검은 복면한테로 달려들었어요. 공격하고 보니 검은 복면은 다름 아닌 정구였던 거예요. 정구는 영상 대감이 사초 때문에 태수를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초를 없애 태수를 살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때서야 태수는 왜 정구가 사포를 훔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지요.
그때였어요. 마당 쪽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춘추관 문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태수는 정구를 데리고 재빨리 책장 뒤로 숨었어요. 잠깐 뒤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습니다. 검은 복면을 쓴 그의 손엔 번쩍이는 칼이 들려 있었어요. 태수를 죽이려고 보낸 자객이 틀림없었습니다. 태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어요.
그는 춘추관 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잽싸게 태수의 책상으로 다가가 마구 뒤적였습니다. 사초를 찾고 이쓴 게 틀림없었지요. ‘흥, 실컷 뒤져 보라지!’ 태수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사초를 깊은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태수와 정구는 책장 뒤에 숨어 있었어요. 정구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다가 실수 그만 책을 건드렸습니다. 책이 떨어지자 자객은 책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자객이 책장 쪽으로 다가오자, 태수는 있는 힘껏 책장을 밀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러고 둘은 춘추관을 빠져나와 우물 쪽으로 달려갔어요. 그 우물은 마른 우물이어서 태수와 정구는 날이 샐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태수는 우물 벽에 감춰 두었던 사초를 꺼내 가슴에 꼭 껴안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지요. 얼마 뒤에 자잭이 나타났다가 잠깐 둘레를 살펴보더니 금세 사라졌습니다. 어두운 밤이라 우물 바닥에 숨어 있는 태와와 정구를 못 봤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우물을 빠져나온 태수는 서둘러 사각으로 갔습니다. 사각은 역대 왕들의 실록을 보관하는 곳이지요. 태수는 사초를 지키기 위해 사초를 봉인하기로 했습니다. 태수가 사각에 이으렀을 때 포쇄관들이 바람과 햇빛에 말린 실록을 거두어 궤짝에 집어넣고 있었어요. 태수가 들어서자 사각을 지키는 병사들이 태수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무슨 일이시오?””춘추관 사관이오. 포쇄관한테 전할 말이 있어 왔소.” “어서 들어가 보시오.” 병사들을 속이고 태수는 얼른 포쇄관들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포쇄관들은 모두 춘추관에서 보낸 사람들이라 낯이 익었습니다. “어,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포쇄관이 태수를 알아보고는 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네 왔어요. “뭐 도와 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태수도 덩달아 웃으며 스스럼없이 대꾸했어요. “그래? 그럼 잘됐구먼. 여기 와서 봉인을 좀 돕게나. 실록에 티끌만 한 흠도 안 생기게 조심하고.””예, 잘 알겠습니다.”태수는 깍듯이 대답하고 실록을 조심스럽게 궤짝 속으로 옮겼습니다. ‘그래, 여기다가 넣어 두면 되겠군.’그런 뒤 사람들 몰래 품속에 있는 사초를 꺼내 실록 사이에 끼워 넣었어요. 만일에라도 누가 볼까 싶어 태수는 오금이 저리고 손발리 떨렸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어요. ‘후유!’ 태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자, 이제 뚜껑을 닫고 봉인을 하세.” 봉인을 마치고 나자 포쇄관들은 실록이 든 궤짝을 모두 누각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궤짝이 다 들어가자 이번엔 누각의 문을 닫고 커다란 자물쇠를 채웠어요. 그제야 태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어요. “아제 아무 걱정 없어!”
-산으로 간 조선왕조실록-
“뭣이, 사초를 봉인했다고?” 영상 대감의 팔자 눈썹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예, 간밤에 우물에 숨어 있는 걸 모르고 찾아 헤메다 뒤늦게 달려갔을 때는 벌써 봉인이 끝난 뒤였습니다.””에잇, 바보 같은 놈!” 영상 대감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허탕을 치고 온 자객한테 팩을 집어던졌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처기는 자기가 그 책에 맞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어요. 황처기가 태수를 도와 사초를 봉인하도록 한 정구를 잡아 오려고 했지만, 영상 대감은 그보다는 먼저 봉인된 사초를 찾아 없애 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한번 사초가 봉인되면 어쩔 수가 없지 않으냐고 묻자, 그 사초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상 대감을 사초를 없애기 위해 마지막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는 자객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경연에 간 태수는 대신들과 임금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첩에 적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대신들은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나라가 이 꼴일 수밖에….’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경연을 지켜보고 있는데, 내시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내시는 숨을 몰아쉬며 임금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습니다. “서각이 불타고 있다니, 그게 정말이냐?” 인조가 내지른 소리에 대신들도 놀라 여기저기서 웅성댔어요. 그러면서 대신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불타는 사각으로 갔습니다. “안 돼! 실록이 불타 버리면 조선의 역사도 사라지는 것이야.”태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더니 쏜살같이 사각으로 달려갔어요. 불길에 휩싸인 사각 위로 검은 연기가 솟구쳤어요. 태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래와 물을 번갈아 가며 사각에 뿌려 댔어요. 하지만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다가는 봉인된 실록들도 결코 안심할 수 없었어요. 태수는 갑자기 물이 가득 든 동이를 집어 들더니 머리 위로 쏟아부었습니다. 정구가 깜짝 놀라 태수의 팔을 붙잡았지만, 태수는 정구의 손을 뿌리치고 불길에 휩싸인 사각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불길이 막 옮겨 붙으려는 궤짝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려 불길을 헤집으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우르르 사각 안으로 뛰어들어 궤짝을 하나씩 들고 나왔습니다. 그 바람에 태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불에 데고 다쳤지만, 실록이 든 궤짝은 모두 안전하게 옳길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이를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쭉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영상 대감이었습니다. 태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지요. ‘이게 다 영상 대감의 짓이었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잔뜩 조바심이 난 태수는 인조 임금을 찾아가 누군가가 실록을 노리고 일부러 불을 지른 게 틀림없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범인을 잡아 달라고 요청했어요. 인조 임금은 반드시 그리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태수는 몇몇 고을에서 맡고 있는 사각을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궁궐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나는 마당에, 다른 곳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어디로 옮겨야 좋단 말이냐?” “깊은 산속이 어떨는지요? 사람들이 쉽게 발 닿기 힘든 산속에 사각을 짓고 병사와 승려들한테 지키게 한다면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깊은 산속이라….””전하,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실록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라.” 마침내 인조의 명을 받은 태수는 곧장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 실록을 산속으로 옮길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삼십쯤 되는 짐꾼들이 실록이 든 궤짝을 지고 길을 떠났어요. 태수도 호위 병사들을 이끌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은 끝에 태수와 무리들은 드디어 깊은 산속에 다다랐어요. 둘레가 가파른 골짜기로 둘러싸인 그곳엔 오래된 절이 하나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바로 이곳이야!” 태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잣말을 했어요. 사각 지을 곳을 마련하자 태수는 목수들을 불러 놓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사각을 지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로부터 오랫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아름다운 사각을 지었습니다.
태수는 실록이 든 궤짝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긴 뒤에 사각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열 수 없게 자물쇠로 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머지않아 저 실록들은 봉인이 풀리겠지. 그때가 되면 저 실록들이 후손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을….’태수는 실록을 품고 있는 사각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부르타식 질문의 예
1. 태수는 왜 무슨 일이 있어도 사초를 지켜야 한다고 했을까요?
2. 영상 대감은 왜 사초를 고치고 싶어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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