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독특한 역사적 전통 가운데 하나는 과거제도입니다. 과거 제도는 고려 시대에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것이 조금도 낯설지는 않지만,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존재한 적이 없던 제도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과거 제도가 폐지된 지는 벌써 100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뜨거운 교육열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과거 제도가 낳은 학문에 대한 숭상과 교육에 대한 열의야말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경제 발전에 원동력을 제공한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희한한’ 전통?
전사들이 지배하던 사회
세계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전통 사회에서는 대개 지위와 신분이 세습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영주와 기사, 인도의 크샤트리아, 일본의 무사 등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지배층은 사실 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농민들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지위와 신분을 세습했습니다.
전사들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거나 반란 세력과의 싸움에 져서 빼앗기면 자신들의 지위와 신분까지도 함께 잃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야 했지요.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 혹은 책임으로 옮길 수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결국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솔선수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춘추 시대까지 모든 지배층은 전사였습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들어 전투의 방식이 소수의 지배층이 전차를 타고 싸우는 것에서 다수의 농민으로 이루어진 보병들 사이의 싸움으로 바뀌면서 전사 계급의 무력 독점은 무너졌지요. 그래서 이 시대에는 학식과 무예가 뛰어난 평민들이 재능을 인정받아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561-618년)를 세운 황제 문제가 587년 과거 시험을 시행하기 전까지는,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제외하면 지방의 호족이나 문벌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해 관직을 독점함으로써 지배층으로 군림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시험 이전에 시행되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은 인재 선발을 맡은 관리가 자기 고향의 인재를 9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면, 중앙에서 이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그 지역에서 힘 있는 가문 출신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아 관리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요.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다
과거는 ‘과목 선거(科目 選擧)’의 줄임말입니다. 오늘날의 선거는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을 뽑는 절차를 가리키며, 영어의 election을 옮긴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옛날부터 중국에서 선거는 ‘인재를 가려 뽑아 관리로 임명한다’는 의미를 지녔지요. 과목은 다양한 시험 방법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唐나라, 618-907) 시대에는 수재, 명경, 진사, 명법, 명자, 명산, 도거, 동자의 8개 과목이 있었답니다. 수험생은 이 가운데 한 과목을 택해 시험을 봐야 했는데, 당나라 때는 승진과 출세에 유리한 명경과와 진사과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명경과는 [시경(詩經)], 서경(署經)] 등 유가의 다섯 경전의 원문과 해설을 얼마나 잘 암기하고 있는지를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오경정의(五經正義)]라는 교과서에서만 문제를 출제했기 때문에 획일적인 내용을 단순 함기하는 부작용이 나왔습니다. 반면 진사과는 국가 정책에 국가 정책에 대한 견해, 육 경전의 암기, 문학적인 글쓰기 등 다양한 능력을 두루 평가했으므로, 점차 진사과 출신이 명경과 출신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결국 송나라(宋나라, 960-1279년) 시대에는 과거 시험이라고 하면 돋 진사과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지요.
수나라 때 도입된 과거 제도는 중앙에서 지방의 관리를 임명함으로써 당시의 지배층이던 문벌 세력을 억누르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로써 시험을 통해서 지식과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을 뽑아 등용하는 제도가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까지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곧바로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치르는 면접시험에도 합격해야만 관리가 될 수 있었지요. 이 시험에서는 수험생의 용모와 풍채, 말솜씨, 글씨체, 문서 작성 능력 혹은 판단력을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면접시험은 누가 시험 감독관이 되는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에 공정한 시험이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여전히 문벌 세력으로 채워져 있던 시험 감독관들은 자신과 출신 배경이 다른 수험생들을 낙방시키곤 했지요. 게다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도 관리로 임명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더불어 천하는 다스리는 사대부
황제가 주관하는 시험
과거 제도가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였습니다. 앞선 당나라가 장군들의 반란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송나라의 황제들은 장군들의 힘을 줄이고 문신(文臣)들의 힘을 키워 자신의 권력을 탄탄히 하기 위해 과거 제도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송나라에서는 우선 면접시험을 폐지하고, 지방에서 치르는 1차 시험과 중앙에서 치르는 2차 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2차 시험의 합격자들은 황제가 직접 출제하고 채점하는 3차 시험, 즉 전시(展示)를 한 번 더 치러야 했습니다. 이는 관리들의 패거리 문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지요.
당나라 과거 제도의 패단 가운데 하나는 당파(黨派)의 형성이었습니다. 합격자들은 시험을 주관한 시험관을 스승으로 받들고, 함께 합격한 사람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며 관리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관리들이 과거 시험으로 맺은 인맥을 통해 당파를 이루게 되자 당파들 사이의 다툼이 극심해지고 관리들의 기강이 문란해졌습니다.
따라서 수험생들에게 황제가 주관하는 3차 시험을 치르도록 하면 황제가 곧 모든 관리들의 스승이 되는 셈이기에 이러한 당파와 패거리 문화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가 사상에서 황제는 군주이자 만백성의 어버이로 추앙받는데, 이제 스승까지 겸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실현한 셈이 된 것이지요.
과거 시험을 더욱 공정하게 치르기 위해 호명법(糊名法)과 등록법(謄錄法)이라는 제도도 마련했습니다. 호명법은 공정한 채점을 위해 답안지의 수험생 이름을 가리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수험생의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채점자와 미리 짜고 특정한 색깔이나 기호, 글자 등을 이용해 부정을 저지를 수 있었지요. 이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이 등록법인데, 수험생의 답안지를 새로 옮겨 적어 채점자에게 전달해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공정성이 한층 강화되면서 과거 시험은 인재를 등용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 밖에도 송나라 때는 과거 시험을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수험생들이 일찌감치 계획을 세워 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 제도의 장점과 단점
과거 시험이 관리를 뽑는 제도로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중국 사회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공정한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게 되자 당나라 시대까지 정치와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문벌 세력은 지배층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요. 송나라 시대의 과거 합격자들을 분석해 보면 조상이 관리가 아니었던 평민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합격하기만 하면 평범한 농민들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점이 과거 시험의 가장 큰 매력이었어요.
과거 제도로 인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것은 사대부(士大夫)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세계사를 통틀어 지식인이 지배층으로 올라선 것은 송나라 이후의 중국과 고려 이후의 우리나라, 그리고 베트남뿐이었습니다. 이제 지식인들은 황제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어요. ‘모름지기 선비란 먼저 천하의 근심을 생각한 뒤에 자신의 일을 근심해야 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누린 뒤에 자신의 일을 즐겨야 한다.’라는 송나라의 개혁가 범중엄의 글은 이러한 주인 의식을 잘 보여 줍니다.
또한 과거 제도는 상당한 평등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과거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유력자의 추천을 받아야만 관리가 되거나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있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의 추천 없이는 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다면 결코 공정한 제도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가 되어 출세가 보장되었지만, 시험에 떨어지면 관리의 자제라 해도 평민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를 계층의 상승과 하강이 비교적 심하다고 일컫지요. 즉 송나라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유럽의 영주나 일본의 무사와 같은 세습적인 신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중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나라와 사회에 대한 평민들의 불만을 줄여 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물론 과거 제도가 긍정적인 측면만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시험이 창의력보다 암기력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나라에서 지정한 유가 경전을 달달 외워야만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고, 특히 후대로 내려가면 정해진 문장 형식에 글자를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창의력은 더더욱 필요 없어졌어요.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과거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창의력인 관리는 송나라의 개혁가 왕안석 한 사람, 혹은 명(明) 나라의明 개혁가 장거정을 포함해 두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과거 제도는 개혁적인 지식인보다 황제에게 복종하고 시류에 따라 지식인을 더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송나라 때부터는 신하가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안정에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개혁이나 변화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시험에만 합격하면 부와 명예와 보장되었기 때문에 과거 시험과 관련된 학문만 공부하는 현상도 일어났습니다. 몇몇 유가경전과 문학 작품만 공부하다 보니 합격자들의 지식의 폭이 넓은 수는 없었지요.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은 외면받았고, 특히 의학이나 과학 기술은 등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말의 개혁가들은 중국이 근대화를 추진하고 유럽의 발달한 학문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과거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결국 1905년, 과거 제도는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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