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북방 유목민이 중국의 일부 또는 전체를 지배한 기간이 꽤 됩니다. 이들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북부 지역을 통치한 기간은 715년이나 되지요. 더 나아가 몽골인이 세운 원(元) 나라와元 만주인이 세운 청(淸) 나라는淸 중국 전역을 지배했는데, 두 나라가 통치한 기간을 합하면 모두 386년입니다. 결국 북방 유목민은 무려 1101년 동안 중국이 일부 혹은 전체를 지배했던 것이지요.
북방 유목민에 관한 진실
북방 유목민이 살아가는 법
북방 유목민들은 유라시아 초원 지대에서 가축을 기르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유목(遊牧)이라고 합니다. 유목민들은 일정한 지역 안에서 계절에 따라 가축과 함께 이동했는데, 이동은 한 해에 여름과 겨울의 두 차례, 혹은 계절마다 네 차례 행해졌습니다. 이처럼 정기적으로 이동하는 이유는 목초지가 황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가축들이 한 곳에서만 풀을 뜯으면 머지않아 더 이상 풀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이처럼 빈번히 옮겨 다니기 때문에 오래 머무는 집을 짓는 대신에 설치와 분해, 운반이 편리한 이동식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천막의 뼈대는 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해 만들고, 그 위에 동물의 가죽의 걸쳤지요. 몽골인들은 이러한 이동식 천막을 게르라고 부르고, 튀르크 인들은 유르트라고 불렀습니다.
유목민들은 초원에 사는 다양한 짐승들을 사냥해서 육류를 섭취했지요. 사냥은 유목민들의 생계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오락이며 그들을 단련시키는 군사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유목민들은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는 사냥을 통해서 평소에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무예를 익혔어요. 그래서 이들이 함께 뭉치면 강력한 기마 군단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공포로 떨다
북방 유목민은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틈이 날 때마다 중국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왜 중국인을 비롯한 농경민들을 괴롭혔을까요?
유목민들은 목축과 사냥만으로는 먹고살아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유목민들도 사람인 이상 탄수화물이 들어 있는 쌀이나 밀 같은 곡식과 야채, 소금, 차 등을 섭취해야 했고, 무기와 도구를 만들기 위한 금속이 필요했답니다. 이러한 물자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 마련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것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외부, 즉 농경 사회로부터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북방 유목민들은 주로 교역, 약탈, 공납, 정복의 네 가지 방법을 통해 중국의 농경 사회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얻어 냈습니다. 먼저 평화적인 교역의 방법이 있었지요. 유목민들과 중국이들이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는 국경 무역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를 견마 무역(絹馬貿易) 혹은 차마 무역(茶馬 貿易)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의 비단 혹은 차를 북방 유목민이 기른 말과 교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농경민과 교환할 만한 물자가 부족하거나 자신들이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약탈을 했습니다.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원래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두려워하며 쓰던 표현이었지요. 유목민들은 주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쪄 힘이 넘치는 가을철에, 곡식을 추수해 먹을 것이 풍부한 농경 지대를 약탈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유독 가을철을 두려워했답니다. 유목민 집단 혹은 유목 국가의 힘이 강력할 때는 중국을 압박하거나 복속시킨 뒤 공납이라는 이름 아래 필요한 물자를 공짜로 얻어 내기도 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최초로 몽골을 통일한 흉노족은 기원전 198년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싸워 승리한 뒤에 조약을 맺어 자신들이 원하는 물자를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경 사회를 직접 정복한 후 세금을 걷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기후, 서로 다른 문화로 인한 불편한 갈등 때문에 유목민들이 가장 꺼리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 유목민들은 종종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를 지배하곤 했습니다. 북방 유목민들은 중국을 어떤 방식오로 통치했을까요? 처음 중국 전역을 지배한 몽골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몽골인들은 어떻게 중궁을 통치했을까요?
칭기즈 칸과 대제국의 건설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을 건설하고 정주 농경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칭기즈 칸은 몽골족 씨족장의 아들로 태아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테무친이었죠.
테무친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닙니다. 테무친이 열두 살이던 때 그의 아버지는 타타르인들에게 속아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살해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친척들이 테무친 가족의 가축을 모조리 빼앗아 갔지요. 그들에게는 유목민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양 한 마리조차도 없었답니다.
테무친은 어머니와 3명의 친동생, 2명의 이복동생과 함께 오논 강 상류에서 들쥐와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하층민의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잡아온 사냥감과 물고기를 이복동생들이 훔쳐 가자 활로 쏘아 죽인 비극적인 일도 일어났습니다. 포로가 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기도 하고, 적들에게 아내를 빼앗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테무친은 이러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는 몽골 고원의 여러 유목민 집단들을 정복하거나 통합하며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206년 마침내 테무친은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로부터 몽골의 칸, 즉 군주로 추대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한 뒤에 휘하의 유목민들을 군사 조직으로 편성했습니다.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십호(十戶), 백호(百戶), 천호(千戶) 등 십진법 단위를 이용해 조직을 만들었는데, 칭기즈 칸도 이를 따랐습니다. 특히 수백 명에서 1000명가량의 전사들로 구성된 천호는 몽골의 군사 조직이자 정치, 행정, 사회 조직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95개의 천호 가운데 일부를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직접 다스렸습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케식’이라는 친위 부대를 만들었지요. 케식은 천호장, 백호장, 십 호장의 자제와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측근 집단이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이들의 충성과 헌신으로 권력을 더욱 튼튼하게 다질 수 있었어요. 또한 유목민들을 통치하기 우해 ‘자식’이라는 전통적인 관습법을 정비했습니다.
몽골족이 내부를 정비한 뒤에는 유라시아 초원의 각지로 군대를 보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지요. 더 나가 만주 및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던 금나라와 중국의 서북 지역을 지배하던 서하를 공격하고, 오늘날의 이란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호리즘을 정복했습니다.
몽골의 정복 전쟁은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 칸은 러시아와 동유럽, 금나라를 정복했고, 손자 몽케 칸은 바그다드를 지배하던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남아시아 전역을 정복했습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정복해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 원나라를 세웠습니다. 정복 전쟁이 계속 성공하여 몽골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탈바꿈합니다.
몽골 제국이 정복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가요?
여느 유목민들과 같이 유목과 사냥을 통해 강력한 전사로 성장한 몽골인들은 강력한 기마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몽골 고원을 통일하며 겪은 수많은 전투에서 축적한 경험을 통해 무적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적을 포용하는 아량도 탁월했지요. 몽골인들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다수의 튀르크 인들을 설득해 지배층으로 끌여들였습니다.
몽골인들은 선전전과 심리전, 정보전에도 능통했습니다. 몽골군이 잔인한 무적의 군대라는 이미지를 여러 나라에 퍼뜨려 공포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공격하기에 앞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멸망시킴으로써 다른 지역 사람들이 두려움에 알아서 항복하게 하는 작전을 펼치기도 했지요. 또한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주변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몽골군은 적군의 사정을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하게 꿰뚫어 보며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는 몽골군에 맞설 만한 강력한 제국이 없었습니다. 대개 분열되거나 약한 나라들뿐이었지요. 이러한 국제 정세에도 세계 제국의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몽골인들이 건설한 통상 제국
우구데이 칸은 자신이 이룩한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얌’을 꼽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역참이라고 부르는데, 제국의 곳곳에 역을 설치해서 문서를 전달하거나 다른 업무를 위해 여행하는 관리들이 말을 갈아타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통행 증명서만 가져가면 말을 갈아탈 수 있고, 잠자리와 음식도 제공받을 수 있었지요. ‘급체포’라는 통신망도 만들어졌습니다. 급체포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들 사이의, 혹은 지방의 관청들 사이의 긴급한 문서 전달을 위한 제도로서, 릴레이 방식으로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이처럼 몽골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촘촘히 뻗은 교통망과 통신망은 군대와 물자의 이동, 제금의 운반 교역의 활성화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칭기즈 칸을 비롯한 몽골 제국의 역대 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교역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는 몽골 제국만이 아니라 다른 유목 국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죠. 유목 국가들은 주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들을 통해 중국의 비단을 유럽 등지에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몽골 제국 떼에는 특히 위구르 상인과 무슬림 상인들이 동서 교역에 종사했습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오늘날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위치에 대도(大都)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 도시들을 ‘칸의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인 중국의 강남 지방과 대도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했습니다. 대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교역로인 초원길과 비단길이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대운하를 통해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강남 지방과 연결되고 다시 바닷길과도 이어졌습니다. 이로써 대도는 몽골 제국의 교통 중심지이자, 전 세계의 물자가 모여드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동서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낮추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몽골 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비단길을 통과하려면 이 길을 지배하는 여러 도시와 나라에 각각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상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지요. 그러나 몽골의 칸들은 통행세를 없애고 최종 목적지에서 거래되는 물건 값의 1/30, 즉 3.3%만을 세금으로 내도록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라시아 전역의 상인들이 몽골 제국으로 앞다퉈 모여들자 교역이 크게 번창했습니다.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유통되는 물자의 양도 크게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제국의 세금 수입은 증가했습니다.
색목인들의 머리를 빌리다
‘말 위에서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으나 다스릴 수는 없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전쟁에 능한 군인들이 중국을 정복할 수는 있지만 통치를 위해서는 군인이 아닌 관리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중국인과 중국 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유목민들, 특히 몽골인들에게 딱 알맞은 격언이었습니다.
한때 일부 몽골인들은 칸에게 황하 유역의 평야를 초지로 만들어 그곳에서 가축을 키우자고 건의했습니다. 중국인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다스리기는 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논밭을 갈아엎어 풀밭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행히 중국의 사정을 잘 아는 참모들이 중국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국 등의 농경 사회에 대해 잘 아는 참모들이 필요했지요. 몽골의 칸들은 주로 색목인(色目人)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색목인은 눈의 색이 몽골인과 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파란 눈의 유럽인들을 비롯해 아랍인, 위구르인을 통틀어 하는 말이었습니다.
색목인은 몽골인들이 유라시아의 초원 지대를 통합할 무렵부터 몽골인들과 협력해 왔지요. 몽골인들도 일찌감치 자신들에게 속한 지역의 색목인들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자신들의 문화나 생활 방식에 익숙한 데다, 문자를 가지고 있어서 까막눈인 몽골인들을 대신해 행정 문서를 쓰고 읽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의 중국 지배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던 중국에는 네 개의 계층이 있었습니다. 가장 위에는 몽골인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이 있었는데, 약 1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주요한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그 아래에는 두 번째 계층인 색목인들이었으며 역시 약 100만 명 정도였지요. 세 번째 계층은 한인(漢人)이라 불리던 사람들로, 금나라의 지배를 받다 몽골에 복속한 중국인들이었는데 전체 인구의 13.8%인 약 1000만 명으로 추산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몽골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남송(南宋)의 중국인 들인들은 남인(南人)이라고 불렸지요. 이들의 수는 전체 인구의 83.4%인 약 6천만 명이었습니다.
몽골은 이러한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하며 특권을 누리는 지배층이었습니다. 색목인은 이들 밑에서 행정을 담당하며 지배층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습니다. 한편 한인과 남인은 몽골인과 색목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일부만이 관리가 될 수 있었죠. 이처럼 몽골인들은 몽골인만이 최고라는 몽골 제일주의에 입각해 자신과 가까운 색목인을 우대하고 한인과 남인들은 차별 대우하며 중국을 지배했습니다.
몽골인들은 농경민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개방적이어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제국의 통치에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개방적이었다고 해서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들의 발전된 문화에 동화(同化)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몽골인들은 중국을 비롯해 여러 농경 사회를 지배했지만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몽골인과 중국인을 별개의 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즉 몽골인들은 십진법 체제로 편성된 군사 조직을 통해 다스렸고, 중국인들은 역대 중국 왕조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몽골인 등의 북방 유목민의 지배를 받은 중국인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비록 군사적으로 약해서 정복은 당했지만, 수가 많은 데다가 문화적으로도 우월했기 때문에 북방 유목민을 동화시켰다고 보았습니다. 북방 유목민이 중국인으로 동화되는 것을 한화(漢化)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 문화에 동화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두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제3의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북방 유목민의 지배는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며, 하늘로부터 지상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믿어 왔지요. 따라서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중국의 천자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또한 자신들의 문화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며 다른 민족들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오랑캐일 뿐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중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중화(中華) 사상, 혹은 화이(華夷 ) 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미개한 야만인으로 무시받던 북방 유목민들에게 거꾸로 지배를 당하게 되었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지요. 중국인들 가운데 북방 유목민 군주가 천자로서 중국을 통치하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천자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싸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역사 학자들은 북방 유목민들이 세운 왕조들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