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항제가 중국을 역사상 처음 통일을 했습니다. 통일 제국은 고작 15년 만에 멸망했지만, 시황제가 실시한 많은 정책들은 뒤이은 왕조들에 의해 대부분 계승되었지요. 그런데 시황제의 통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후의 중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긍정적일까요? 아니면 부정적일까요?
중국의 쿵푸 영화 스타 이연걸이 주연한 [영웅]이라는 영화는 시황제의 암살을 둘러싼 한 자객의 심리적 고뇌를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폭정을 일삼는 시황제를 살해하기 위해 친구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면서 시황제의 궁에 침입하지만, 결국 시황제라는 ‘영웅’이 중국을 통치하는 것이 민족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암살을 단념하지요.
세상의 모든 것을 통일하라
진나라의 통일 과정
진나라는 춘추 시대에는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황하 유역의 여러 나라로부터 ‘오랑캐’라는 말로 무시당하던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뛰어난 인재들을 받아들여 등용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시행해 전국 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지요. 특히 효공이 등용한 상앙은 지배층의 특권을 없애버리고 대규모 군대를 양성하며 이를 뒷받침할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만들었지요. 상앙의 개혁은 지배층의 반발을 샀지만 진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진나라는 주위의 여러 나라들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시황제의 증조할아버지였던 소양왕은 멀리 있는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혀야 한다는 범수의 전략을 따라 장군 백기를 등용해 전쟁에서 계속 승리해 영토를 확장했지요. 이로써 진나라는 마침내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기원전 230년 시황제는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먼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고작 9년 만에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시황제는 하루에 약 30킬로그램의 문서를 일일이 결재했으며, 이를 위해 잠을 줄이면서 일한 정력적이고 근면한 군주였답니다. 시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통일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새로운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황권의 권위를 높여라
시황제는 먼저 통일 제국에 걸맞도록 군주의 호칭부터 바꾸었습니다. 왕(王)이란 호칭은 원래 중국의 유일한 지배자인 천자(天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시황제는 이미 망한 나라들의 군주를 부르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자신의 덕이 삼황호제(三皇五帝)보다 크다는 의미로 삼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라는 호칭을 새로이 만들었지요. 그리고 첫 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하고, 자신의 후계자들을 2세 황제, 3세 황제로 불러 황제의 권위를 영구히 전할 것을 천하에 공표했습니다.
시황제는 백성들에게 황제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통일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부터 10년간 무려 다섯 번이나 전국 순행(巡行)했습니다. 시황제는 이민족 통치와 장성의 축조를 감독하기 위해 북서쪽의 변방을 시찰하고, 자신이 멸망시킨 여섯 나라의 옛 영토도 돌아보았습니다. 태산을 비롯한 유명한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선을 만나기 위해 영험하다는 산과 바다를 찾아가기도 했지요.
그러나 안락한 궁전을 놓아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힘들고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자객이 황제가 타고 있던 수레를 공격해 박살을 내기도 했지요. 후에 시황제의 뒤를 이은 2세 황제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짐이 나이가 어려 백성들이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시황제께서는 각 지방을 순회하며 강력함을 보이셨고 천하를 복종시키셨다. 지금 순행을 하지 않으면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기에 천하를 장악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시황제나 2세 황제는 순행의 고단함과 위험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제국을 하나로 묶어라!
시황제는 제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를 군과 현에 보내 지방을 직접 다스렸습니다. 파견된 관리들은 현지에서 황제의 명령을 실행하고 현지의 정보를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지방의 관리들이 독립하거나 현지의 토착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지역 출신이 관리로 임명되는 것을 금하는 제도도 시행했습니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는 모조리 몰수한 뒤 녹여서 커다란 종과 사람 모양의 조각상으로 만들어 궁중에 세워두기도 했지요.
도량형과 화폐, 수레의 폭, 문자 또한 통일했습니다. 전국 시대에는 나라마다 닥닥 달랐던 것들의 표준을 정함으로써 세금을 걷거나 지방을 다스리는 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조치라 할 수 있지요. 수도 함양과 제국의 여러 지역들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건설했습니다. 이 도로는 황제의 순행에 이용되었고, 군대와 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편리하게 해 제국의 통합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 주었습니다.
한편 시황제는 엄격한 법치를 주장한 신하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라를 비방하는 사람은 일족 모두를 처형한다는 명령을 내려 백성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옛 여섯 나라의 역사 책과 문학 책,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의 책들을 모두 몰수해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유생들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열망하는 시황제에게 사기를 치자 황제는 460여 명의 유생을 산 채로 땅에 묻어 버리는 잔혹한 일도 저질렀지요. 이러한 탄압은 학문과 사상을 철저히 통제해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영토를 넓히고 성을 쌓다!
시황제는 통일 이후 나라 안의 일들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나라 외부에도 관심을 돌렸습니다. 당시 북방의 유목 국가 흉노는 진나라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오르도스 지역은 수도 함양의 바로 북쪽이었는데, 지형이 그리 험하지 않았으므로 흉노의 기마 군단이 남쪽으로 진격해 오면 수도를 지키기가 어려웠지요. 시항제는 먼저 군대를 파견해 흉노를 더욱 북쪽으로 몰아내어 오르도스 지역을 확보했고, 흉노가 다시 침략해 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5천여 킬로미터 길이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북방의 위험을 제거한 후에는 남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기원전 214년에는 오늘날의 베트남과 중국 남주 지역에 위치한 백월을 정복하고, 죄수 50만 명을 보내 그 지역을 개발하고 방어하도록 했지요.
남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중국의 기본적인 영역이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의 영토는 확대와 축소를 반복했지만, 시황제가 정복한 영토는 후의 여러 왕조들의 대략적인 영토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너무 위대해서 너무 빨리 멸망한 통일 제국?
무리한 토목 공사와 백성들의 고초
시황제는 자신이 차지한 부와 명예, 권력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불로장생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해 준다는 불로초라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외국까지 사람을 보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지 11년 만인 기원전 210년, 순행 도중 사망하고 맙니다. 그가 죽자마자 통일 제국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해 결국 기원전 206년 멸망을 하게 되지요.
시황제가 자손만대까지 유지되기를 바랐던 통일 제국이 불과 15년만에 멸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도 무리한 토목 공사를 한꺼번에 벌여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결국 백성들의 마음이 진나라와 시황제로부터 떠났기 때문일 겁니다. 흉노족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은 비록 전국 시대 연나라와 조나라의 장성을 활용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몹시 고단한 노동이었지요. 게다가 시황제는 자신의 새로운 궁전인 아방궁과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무덤인 여산릉을 엄청난 규로 건설했습니다. 아방궁과 여산릉을 짓는 데 동원된 인원은 무려 7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네요. 도로의 건설과 같은 다른 토목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까지 합치면 매년 30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당시 진나라 전체 인국의 약 15%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답니다.
진나라 몰락의 또 다른 원인 가혹한 법정치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혹한 법치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황제가 죽은 뒤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은 본래 하급 관리로서 북쪽 변경을 지키러 가는 900명의 농민들을 인솔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홍수가 일어나 정해진 날짜에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에도 인솔하는 사람을 비롯해 모두가 엄한 처벌을 받아야 했지요.
진승이 오랜 친구 오광에게 대책을 물어보자 오광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고 합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따로 있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죽을 바에야 진나라와 한번 싸워 보세.” 용기를 얻은 진승은 오광과 더불어 인솔하던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반란으로 인해 진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훗날 진나라가 망한 뒤 중국을 재통일하고 한(韓)나라를 세운 유방 또한 여산릉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죄수들을 호송하다가 날짜를 지키지 못해 도주해 진나라에 반기를 들게 되었죠.
공자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황제와 2세 황제 같은 법가 사상의 추종자들이 명심해야 했던 명언이기도 합니다. 나그네 옷을 벗긴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었다는 이솝 우화의 가르침처럼, 백성을 다스릴 때는 윽박지르고 몰아세우기보다는 부드러운 방법이 더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시황제는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시황제와 진나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진나라의 뒤이은 한나라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시황제를 폭군으로 낙인찍고 진나라의 정치를 폭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와 시황제는 폭정과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고, 법가 사상은 악을 상징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황제의 시대가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나라는 아니었지요. 오히려 진나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로서 여러 측면에서 역대 중국 왕조의 모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먼저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다 실패했던 중앙 집권적 통치 방식은 진나라 이후의 왕조들에 의해 지방을 통치하는 기본적인 원리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이 여러 차례의 분열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나라로 유지될 수 있었지요. 평균적으로 1세기 가운데 75년을 통일 국가가 지배했다는 것은 유럽이나 인도 등 세계 다른 여러 나라와 비교해도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겁니다.
그리고 시황제가 도입한 법치도 역대 중국 왕조에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한나라는 외면적으로는 진나라를 부정했지만 진나라의 법치 체계를 받아들여 계속 시행했습니다. 한나라 때부터 유가 사상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법치는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중에도 유용하게 자리 잡았지요.
진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했지만 ‘진’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럽 등에서도 중국을 일컫는 차이나(China)가 바로 ‘진’에서 유래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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