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오래도록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세계의 뛰어난 문명 가운데 하나를 이루어 왔습니다. 인류의 지식 발전과 교역, 전쟁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많은 발명품들이 중국에서 나왔지요.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불리는 종이, 목판 인쇄술, 나침반, 화약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무척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종이와 목판 인쇄술은 책을 대량으로 찍어내어 지배층이 아닌 평범한 일반 사람들도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나침반은 대양을 항해해 멀리 떨어진 다른 대륙과의 교역과 교류를 가능하도록 했고, 중국인들이 폭죽놀이를 위해 사용하던 화약은 유럽인들의 손에 들어가 훗날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정복하는 무기로 거듭났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며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럽이나 인도 문명과는 다른 중국 문명만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드넓은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나라로 유지되어 온 비결은 무었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인들이 지나온 과거, 즉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위나라 혜왕이 자신을 찾아온 맹자에게 물었답니다. “과인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 일하고 선정을 베풀어 왔소.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백성은 늘어나지 않고 이웃나라이 백성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지요. “왕도를 따르는 정치를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아 잘살게 만들며 백성들을 가르쳐 도덕을 일깨우시면 됩니다. 왕께서 진심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려 하신다면 저절로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살기 좋은 위나라로 올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대혼란의 시대
춘추 전국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춘추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기원전 770년-기원전 403년)와 전국 시대(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를 합해 가리키는 말입니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라는 노(魯)나라 역사책에서, ‘전국’은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 (戰國策)]이라는 일종의 외교와 군사 전략에 대한 책에서 나온 말이지요.
중국의 황하 유역을 다스리던 주(周) 나라는 이민족 견융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뒤부터 왕실의 권위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이민족의 침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일어났으니, 이를 춘추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극상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강력한 힘을 가진 신하가 군주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거나 아예 스스로 왕이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나라의 신하였던 전 씨는 군주를 몰아내고 그 자릴 빼앗았고, 심지어 노나라에서는 군주의 권력을 빼앗은 신하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또다시 권력을 빼앗기는 일마저 일어났지요.
춘추 시대 중반부터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합해 영토를 넓히는 본격적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춘추 시대에 170여 개 정도의 나라들 가운데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진(秦)의 일곱 나라만이 남게 됩니다. 이 나라들을 ‘전국칠웅’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는 중앙에 자리한 위나라가 두각을 나타냈지만 곧 제나라에게 주도권이 갔고, 이후 연나라와 조나라가 잠시 강력해 졌지만 주변 나라들의 견제로 상승세가 꺾였습니다. 결국 전국 시대를 주도한 나라는 진나라였습니다. 진나라가 부상함에 따라 나머지 여섯 나라들은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쳤지만,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차례로 정복한 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합니다.
혼란함 속에서 싹튼 변화와 창의적 인재의 등장
전국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진보는 전투 방식의 변화였습니다. 춘추 시대는 지배층인 소수의 전사들만이 전차를 타고 싸우는 소규모 전투 형태를 이루고 있었어요. 그러나 계속 전쟁 중이던 전국 시대에는 수십만 명의 보병이 전쟁에 참여하는 대규모 전투가 많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는 수많은 보병을 동원해 적국의 성을 공격, 함락시켜야 했기 때문이지요.
각 나라들은 새로운 전투 방식을 도입하고 더욱 치열해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위한 여러 정책을 개혁해야 했습니다. 상앙이 진나라 효공에게 제안했던 것을 보면 개혁 정책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엄격한 법치(法治)를 시행해야 합니다. 먼저 왕실의 친척과 귀족들의 특권을 없애고 공을 세운 이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사람을 엄히 벌하면 백성들이 나라에 충성할 것입니다. 또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어 평소에는 농사에 전념하게 하고 농사일이 없는 시기에는 군사 훈련을 시켜서 강력한 군대를 만드십시오. 그러면 어떤 전쟁이 일어나도 항상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 조직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중앙의 명령을 전국의 모든 지역에 일사불란하게 전달하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 제도를 도입해야 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나라에 세금을 내고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 싸울 농민들의 기본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도 필요했어요. 이처럼 전국 시대의 전투 방식의 진보는 군사 제도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개혁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각국의 군주들은 출신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을 대거 기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출세를 꿈꾸거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사상과 주장을 펼치고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라 일컫는 여러 학파의 사상이 화려하게 꽃핀 것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배경 덕분이었습니다. 일부 선구적인 지식인들은 군주를 찾아서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난세를 바로잡을 길을 설파하다
제자백가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일까요?
제자백가는 춘추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까지 활동한 유가(儒家)와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여러 학파의 지식들인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가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학파이지요. 공자는 옛 주나라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봤습니다. ‘군주는 군주답게 나라를 다스리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해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자와 유가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신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부에 걸맞은 역할과 예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평민들도 출세하는 시대에 신분 제도가 엄격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설은 그리 인기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자는 정치하는 것을 단념하고 교육에 힘썼는데, 이제까지 지배층에게만 허용되었던 교육을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줌으로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백성들을 법으로 엄하게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군주의 입장에서 법과 기지, 권력을 이용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논의를 했습니다. 그는 법이란 엄격하고 빈틈이 없어야하며, ‘평화로울 때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전쟁이 나면 군인들을 강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요. 이런 그의 주장이 전국 시대의 정치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는 논리와 정책이었습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시황제도 한비자의 글을 읽고 감동해서 그를 기용하고자 했습니다.
도가는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하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도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노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놓아두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닭 우는 소리가 나라의 반대편 끝까지 들릴 만큼 좁은 영토와 적은 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지요. 도가는 후에 여러 토속 신앙들과 결합해 중국 고유의 종교인 도교로 재탄생했습니다. 정치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이죠.
묵자는 묵가를 창시한 이로서 겸애, 즉 차별 없는 사랑을 주장하고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신분 제도의 굴레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무척 참신한 이론이었지요. 묵가는 사치와 향락, 음악을 배격하고 지나치리만큼 검소한 삶을 살도록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진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면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해 빈부와 귀천을 나누는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모든 불평등이 해소되고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일도 없어 이상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외에 종횡가는 살벌한 약육강식의 시대가 각 나라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 전략을 주장했지요. 손자와 오자가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병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술과 전법, 군사 전략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농가는 나라의 근본이 농사임을 강조했지요. 요컨대 제자백가라고 불린 지식인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방법과 대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제자백가 중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제자백가 중 최종적으로 승리한 학파는 유가였습니다. 유가는 춘추 전국 시대에는 군주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훗날 중국의 정치 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법가는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통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한때 천하를 풍미한 묵가는 지난 친 검약을 주장해서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며, 차별 없는 사랑 또한 예로부터 신분 제도를 긍정해 온 중국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바면 유가의 사상은 혼란 시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데는 매우 쓸모가 있었던 거지요. 폭력이 아니라 예와 도덕으로 통치하는 방식은 평화 시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적합한 사상이었습니다. 효와 장유유서 같은 윤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사회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만들면 통치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유가 사상은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어 중국의 정치와 사회, 사상에 독보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유가에도 약점은 있었어요. 유가 사상은 통치 이념으로는 훌륭한 사상이었지만, 실제 국가를 운영하는데는 ‘법과 제도’가 필요했으므로 군주는 강력한 권력과 엄격한 법치를 지지하는 법가 사상을 계속 활용을 했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가 사실상 중국의 사상과 학문을 완성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제자백가 이후에도 많은 정치가와 사상가, 철학가들이 활동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도 제자백가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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