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일본,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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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일본,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다

by &#$@*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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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한 뒤 제국을 통일하며 유럽 강대국이 된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 청나라와 러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제국주의에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도대체 섬나라 일본은 어떻게 중국, 러시아와 싸워 이기게 되었을까요?

 

그림 자료: 청일, 러일 전쟁 지도: 출처-위키피디아
(그림 자료: 청일, 러일 전쟁 지도: 출처-위키피디아)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는 나라 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두 차례의 아편 전쟁에서 모두 패한 청나라는 서양 열강에 이리저리 뜯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어요. 그러자 청나라 내부에서 자신들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들은 서구의 발달된 무기를 들여와 군대를 강화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서양 무기 제조 공장을 만들고 군대를 개혁하며 스스로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나 하드웨어는 중국 것을 유지하고 소프트웨어만 서양 것으로 바꾼다는 생각 때문에 완전한 개혁하는 것에는 실패를 했습니다. 

 

한편 군사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막부 체제 아래에서 쇄국 정책을 유지해 오던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개항 요구에 굴복해 항구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럽 열강이 일본으로 몰려와 너도나도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화를 개방한 이후 서양 열강과 잇따라 통상 조약을 맺은 것과 비슷하지요.

 

기왕에 연 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군대 체계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제도도 서구의 것을 이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구처럼 부강해 지자  서구 열강 세력을 서서히 자기네 섬에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는 해 청나라와 뜨는 해 일본의 한판 승부전

그러고 나서 지는 해 청나라와 떠오르는 해 일본이 조선 땅에서 한판 붙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청일 전쟁입니다.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는 거라면 그들 사정이지만 왜 하필 남의 땅인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을까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힘이 강해진 일본은 미국한테 당한 방법을 조선에서 똑같이 써먹었습니다. 그들은 1875년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몰고 와 무력시위를 벌였습니다. 힘이 없던 조선은 강압에 못 이겨 제물포 항을 개방하고 양국 간 관세를 없애는 강화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지요. 가뜩이나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진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일본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종주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이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자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진짜 목표가 조선이 아니라 바로 청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청나라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지요. 

 

이미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겪어 봐서 알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는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문물을 전해 받던 섬나라 일본과 싸워서 지지 않을 자신이 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일본이 이미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제국주의 모습을 갖췄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 싸움을 벌일 때 조선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수구파와 개화 파과 서로 대립하고 있었어요. 이들은 각각 청나라와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1894년 청일 전쟁의 발단이 되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에 대한 오랜 수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수탈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조병갑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였지요. 이에 분노한 농학 농민들이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해 고부 관아를 습격하면서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자,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해 달라며 청나라에 군사 요청을 했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일본도 군대를 보내겠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왜냐하면 청나라든 일본이든 어느 나라가 먼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나라도 똑같이 군대를 파견하기로 조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기로 하자 동학 농민군은 외세의 침략을 우려해 정부군과 휴전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입니다.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 전쟁: 남의 나라에서 뭣들 하는 짓인가?

일본군은 평양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곧바로 랴오둥 반도에 상륙해 중국 땅 뤼순을 접수했습니다. 이어 산둥 반도로 쳐들어 갈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청일 전쟁 결과 일본과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걸 인정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명목상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야 자기들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자료: 청일, 러일 전쟁의 희생자는 조선; 출처-경향 신문
(그림 자료: 청일, 러일 전쟁의 희생자는 조선; 출처-경향 신문)

 

일본은 또 청나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기로 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해 땅도 얻고, 배상금도 받고,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이득을 남긴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성과는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목표에 한 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 청나라를 개혁하려던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또다시 서수 열강에 물어 뜯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은 물론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던 일본이 거대한 중국을 이기다니! 일본은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본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서구 열강 때문에 일이 틀어져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청일 전쟁 이후 두 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그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왔어요. 세 나라는 일본에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요구했습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일본 일에 간섭을 했다고 해서 이 사건을 삼국 간섭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은 다 잡은 사냥감을 표범에게 빼앗긴 승냥이처럼 허탈해했지요. 결국 일본은 삼국 간섭에 굴복하고야 말았습니다. 삼국 중 가장 심하게 요구했던 러시아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러시아는 일본이 물러간 뒤 청나라로부터 뤼순 지역의 조차권을 얻어 냈습니다. 일본이 차지하려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조선을 놓고 적잖게 부딪쳤습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한 해 전 일본인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한 일이 있었는데, 고종은 이 사건 때문에 일본에 대해 충격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간 것입니다.  이 사건을 러시아 공사관인 아관으로 왕이 피난을 갔다고 해서 아관파천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친러파 관리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원한은 계속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원한만 가지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강한 군대와 외교력이 있어야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902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든든한 파트너를 두게 된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협상을 벌여 만주와 한반도에서 두 나라가 이권을 나눠 가지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에 소극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러자 협상을 벌이던 일본 대사가 돌아가더니 다른 협상 카드 대신 전함을 몰고 러시아 앞에 나타났습니다. 

 

 

러시아도 물리친 일본, 신흥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다

1904년 일본 해군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 두 척을 침몰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랴오둥 반도 뤼순에 있던 러시아 선박을 공격했어요. 선전 포고는 열흘이 지나서야 했습니다. 일본군은 한반도를 지나 1905년 5월 만주에 진입한데 이어 러시아 군이 있는 뤼순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그림 자료: 러일 전쟁의 시작점이 된 제물포; 출처-경인 일보
(그림 자료: 러일 전쟁의 시작점이 된 제물포; 출처-경인 일보)

 

러시아도 반격에 나섰습니다. 러시아 함대가 태평양으로 몰려왔습니다.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는 1905년 대한해협에서 맞붙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일본도 힘이 부쳤습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뒤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주선으로 전쟁을 끝내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 결과 두 나라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의 모든 권리와 사할린 일부 지역을 일본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이때 일본은 10년 전 삼국간섭으로 잃은 뤼순을 다시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자 세계 각국은 10년 전 일본이 청나라를 이겼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러시아와 싸워 이겨 이제 누가 뭐래도 제국주의 국가 반열에 올라섰다가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러일 전쟁 직후 조선을 차지한 일본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이 강제로 맺게 했다고 하여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을사조약 결과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우리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해 마침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오랜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을 집어삼키고 대륙으로 진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1937년에는 난징에서 대학살을 자행하고, 중국 내륙에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중국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을 벌였고, 그 싸움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침략을 당했던 중국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보다 일본에 대한 원한이 더욱 큽니다. 섬나라 일본에 치욕을 당했다는 모욕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총리가 신사 참배를 할 때 중국이 우리보다 더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일본,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승리 후 조어도와 독도 강제 편입 시도

일본은 현재 우리와는 독도 문제로, 중국과는 조어도(중국명 다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 문제로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도와 조어도는 전통적으로 조선과 중국의 영토였습니다. 이는 일본도 인정한 것이지요. 그런데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태도를 바꿔 ‘조어도는 주인 없는 땅’이라며 조어도를 자기네 영토로 강제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러일 전쟁에 승리한 뒤에는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며, 이 역시 강제로 영토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영토 분쟁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100년 후까지 이어질 전망입니다. 일본은 자국의 정치 혼란이나 경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국민들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 떨어진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독도와 조어도 문제를 언제든 꺼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란?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노동자들은 빵과 평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군이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0여 명이 희생을 당했어요. 이 사건이 있은 뒤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서구 열강들은 러시아에서 점화된 혁명의 불길이 자기네 나라로 번질까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가 내부 사태에 힘을 쏟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도록 유도했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일 전쟁이 종결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원숭이에게 패한 판다와 북극곰의 운명 (청일, 러일 전쟁 후에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일 전쟁(1894년)과 러일 전쟁 (1904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전쟁터가 애꿎은 한반도와 주변 바다였다는 점입니다. 그때 조선은 다른 나라가 우리 땅에 와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도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라고 할 힘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전쟁의 승자가 모두 일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을 격파했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덩이를 가진 러시아를 무너뜨렸습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섬나라 원숭이가 판다 중국과 북극곰 러시아를 이겼다는 비아냥거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고, 중국과 러시아는 극심한 내부 진통을 겪었습니다. 

 

청일 전쟁 패배 후 중국은 변법자강 운동 따위의 개혁을 시도하긴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쑨원이 중심이 된 세력이 1911년 우창에서 봉기해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수천 년 이어져 온 황제의 나라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소련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돼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결을 펼쳤습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통의 적이 있을 때는 협력하고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 패한 일본이 물러나자 중국은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져 결국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사회주의 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1949년). 이후 중국은 덩 샤오핑이 지도자로 들어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개혁 개방 정책을 펼쳤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결합한 중국의 실험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일 전쟁에 패한 러시아에서는 1917년 노동자와 병사들이 황제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어 레닌은 노동자 농민 등이 중심이 된 볼셰비키 세력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지구촌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러시아 국내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후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세기적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은 이후 미국과 양강 구도를 유지하며 동서 냉전의 중심 국가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소련)은 198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에 의해 변화를 맞았지요. 그가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속한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은 지금 러시아로 재탄생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동서로 분단됐던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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