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주방장 박효남 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총주방장 박효남 이야기

by &#$@* 2023. 9. 19.
반응형

[총주방장 박효남 이야기]는 박효남 총주방장이 여러 요리사를 거느린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실화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박효남 총주방장은 어린 시절 어렵던 가정환경에서도 요리사의 꿈을 키우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 계단 한 계단 성실하게 노력합니다. 총주방장의 직책을 맡은 뒤에도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여 음식을 개발하는 등 배움의 자세를 놓지 않았지요.

꿈을 한 번에 이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박효남 총주방장이 정식 요리사가 되기 위해 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차근차근 배워 나갔듯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아이의 꿈은 무엇인지,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고의 맛을 찾아가는 요리사 총 주방장 박효남 이야기

 

- 감자 깍기-

나는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남아프리카 음식 축제를 위해 그곳 요리를 배우러 간 것이지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리는 강한 향신료와 와인을 많이 썼는데, 내 전공인 프랑스 요리에 비해 투박하긴 하지만 만들 때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각종 야채를 넣고 고추와 토마토로 맛을 낸 악어찜, 소금구이를 한 뒤 악어 뼈를 고아 만든 소스를 뿌린 악어 스테이크, 타조 숯불구이 등을 새로 배웠습니다.

 

최고의 맛을 찾고자 노력해 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정말 요리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보자면 그곳 주방의 요리사들은 요리 재료를 우리나라 일반인들처럼 더듬더듬 깎더군요. 내가 시범을 보여 주었더니, 다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실 ‘감자 깎기’는 초보자 시절, 요리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내가 부딪힌 최초의 벽이었답니다.

 

요리사 보조로 취직한 뒤 하루에도 수백 킬로그램의 감자를 깎아야 했는데, 빨리하지 못해 선배들로부터 온갖 구박을 받아야 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빨리 감자를 깎아야 선배들 옆에서 일을 거들며 요리를 배울 수 있었거든요. 나는 날마다 삶은 계란을 감자 대신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출퇴근 버스나 집에 가서도 계란을 쥐고 감자 깎는 연습을 계속했지요.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하는 길만이 내가 잘 살 수 있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 나의 첫 사회생활, 연탄 배달 -

나는 강원도 고성에서 살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제대 후에 사업을 했지만 세상 물정을 몰라 번번이 실패를 했어요. 아버지는 서울 창동으로 이사해 연탄 가게를 열었지요. 중학교 시절 떠오르는 추억은 아버지와 내 얼굴이 시커멓게 칠해진 연탄 자국입니다. 아버지를 도와 연탄 배달을 해야 했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서울로 올라오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실질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렀지만 항상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던 아버지의 믿음과 격려가 내게는 가장 큰 힘이 되었지요.

 

중학교 졸업 후 나는 스스로 진학을 포기했어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어서 등록금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고, 공부를 해야 할 동생이 두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죠.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님 마음이 더 아팠을 것입니다. 나는 종로에 있는 의사 협회에서 사환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소 옆에 ‘수도 요리 학원’이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요리는 여자들의 일이어서 남자가 요리를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때였지요.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그곳에 자꾸 마음이 끌렸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한 끝에 학원에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원에는 남자도 더러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자격증을 따서 중동 지역에 파견 요리사로 나가거나 장사를 할 목적으로 배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요리에서 예상 밖의 재미를 느꼈지요. 매일 열심히 학원에 다닌 결과 곧 요리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고, 원장 선생님 추천으로 하얏트 호텔 보조 요리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 내게 주어진 임무가 바로 감자 깎기였는데, 일에 서툰 만큼 나는 여러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주방은 전통적으로 규율이 대단히 엄격한 곳이지요. 불과 칼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이죠. 군대에서도 특히 사격장에서 군기가 더욱 엄격한 것처럼 말이에요. 

 

선배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중학교만 졸업한 나로서는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시간 먼저 출근해 준비를 해 놓고, 동기들이 다른 잡무를 할 때 나는 선배를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웠지요. 프라이팬을 능숙하게 돌리기 위해 야채 대신 소금을 넣고 감자 깎기 이상으로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퇴근 후에도 늦게까지 남아 선배들의 잡다한 일을 도우며, 선배들이 나를 보면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새로 배운 것은 항상 바로바로 메모를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익힌 요리는 남들이 퇴근한 뒤 꼭꼭 연습을 해 보았지요. 칼에 베이고 불에 데는 일이 많았지만, 날마다 조리법을 하나하나 알아 가는 재미에 나는 피곤한 줄 몰랐지요.

 

- 경쟁하지 않고 정직하게 요리하다 -

‘게으른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나의 인생철학입니다. 비록 편안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방송 통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밤 열두 시 넘어 집에 도착하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어머니가 녹음해 놓은 방송을 들으며 공부를 하였고, 모르는 부분은 출석 수업을 하는 일요일에는 학교에 가서 배웠지요. 그렇게 졸업을 한 뒤, 1983년 지금의 힐튼 호텔이 생기면서 사원을 모집할 때, ‘고졸’이라고 써넣으며 뿌듯해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요리 용어가 주로 주로 영어와 불어로 되어 있는 데다 외국인 요리사와 이야기하며 조리법을 알아내고 싶은 욕심에 영어 학원에도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요리에 관한 대화를 하면 내 의견까지 낼 수 있을 정도로 회화 실력이 늘었지요. 힐튼 호텔에서 프랑스 식당을 열 때, 나에게 일을 맡긴 이유 가운데 하나가 영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분수에 맞도록 정직하게 살자.’는 내 삶의 철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힐튼 호텔에서 사원을 모집할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위치를 부풀려 서류를 제출하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들은 처음에 원하는 자리를 얻었으나, 실무 현장에서 일을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직하게 퍼스트 쿡(first cook)이라고 썼고, 분수에 맞는 자리를 얻어 위치에 맞는 실무를 차근차근 익혀 나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해, 상사가 해외 연수를 가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큰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음식이 맛없다고 할까 봐 더욱더 최선을 다했지요. 이때 새로 개발한 소금구이 스테이크와 생선구이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그 일로 회사에서 나를 더욱 신뢰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후 외국에 나가 다양한 요리를 배워 오기도 하고, 전례가 없는 초고속 승진을 거쳐, 총주방장의 직책까지 맡게 되었답니다. 전 세계 힐튼 호텔 가운데서 현지 사람이 총주방장을 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총주방장은 호텔 안에 있는 모든 주방과 식당, 200명 가까운 요리사를 관리하는 어려운 자리입니다. 요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통솔하는 일이기도 하다 보니, 고속 승진한 젊은 주방장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 있을 수도 있었고, 그럴수록 진정한 실력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나의 조리 노하우를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기도 합니다. 좋은 조리법을 나 혼자만 알아 아랫사람은 잘하지 못한다면, 결국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기 때문이죠. 최고의 요리사이자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주방에서 만든 음식이 최고 수준에 이르는 것 말고는 왕도가 따로 없다고 봅니다. 

 

- 목표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요리사는 프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습니다. 혀의 감각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손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기 전까지는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요리사가 배부르면 좋은 요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죠. 

 

나는 남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게 기쁩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어하며 말끔히 먹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습니다. 음식에 관심을 보여 주는 손님은 더욱 좋지요.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해 나는 언제나 설레는 즐거운 마음으로 조리대 앞에 섭니다. 손님들이 식사를 하러 올 때는 틀림없이 즐거운 마음일 텐데, 그 마음에 부응하려면 나부터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욱 좋은 맛이 나니까요. 

 

유행이 변하는 것처럼 요리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지요. 내가 뒤늦게 초당 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조리의 이론과 과학적 원리를 알아야 더욱 요리를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배움이지 직책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늙어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요리를 할 것이고, 다른 일은 할 생각이 없습니다.

 

프랑스 요리가 전공이지만, 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프랑스 요리 개발을 위해 늘 노력해 왔습니다. 싱가포르 국제 요리 대회에서 한국 간장을 넣은 프랑스 요리로 상을 받게 된 것도 그 덕분이지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94년에는 다섯 개 부분에서 금상을 받았지만 처음으로 우리나라 소스를 실험적으로 사용해 본 첫 도전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로 정한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 성취감이 드는 것은 아주 잠깐이고,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고, 또 다른 봉우리를 향해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요리사인 나에게 목표는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완성이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 먼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없다.”입니다. 매일 만드는 한 사람분의 맛있는 요리가 내가 올라야 할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한마디 해도 된다면, 꿈과 습관을 가지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명확한 꿈과 목표 의식을 가능한 젊은 시절에 세우세요. 그리고 어떤 분야이건 자신이 진정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 성취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마는 오기로 하루하루 그 일을 반복해 나가는 습관을 들이세요. 진정한 실력을 갖추게 되면 반드시 그만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하부르타식 질문의 예:

- 박효남 요리사는 왜 남들보다 노력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을까요?

- 박효남 요리사는 왜 조리 노하우를 모두에게 공개했을까요?

- 박효남 요리사는 왜 계속 공부를 할까요?

- 박효남 요리사는 왜 어린이들에게 꿈과 습관을 가지라고 당부를 하고 있을까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