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에 패해 청나라가 한창 혼란스러울 때, 러시아는 흑해에서 오스만튀르크,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습니다. 전쟁터가 흑해의 크림 반도였기 때문에 이 전쟁을 크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은 비참했지만 천사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간호 활동은 빛났지요.
러시아는 왜 이 전쟁을 벌인 것일까요?
크림 전쟁이 일어나기 약 160여 년 전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키가 2m가 넘고 얼굴이 잘 생긴 황제였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서유럽의 프랑스, 영국, 독일처럼 힘센 나라가 되기를 열망했지요. 그렇게 되려면 항구를 통해 넓은 세계로 나가야 했어요.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가졌지만 가장 추웠습니다. 너무 추워서 1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이 없었습니다. 항구가 있어야 다른 나라와 교역도 하고, 전함을 몰고 나가 다른 나라 땅도 차지할 수 있었지요.
표트르 대제는 고민하다가 발트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러고는 발트해의 강국인 스웨덴을 꺾고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한 발 더 나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새로 만든 도시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발트해를 통해 세계 시장으로 나가려고 하자, 서유럽 강국들이 러시아를 경계하고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다!
서유럽 강국들 때문에 발트 해를 통해 세계를 진출하려던 꿈이 꺾이자 러시아 짜르들은 남쪽의 흑해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1825년 새 짜르가 된 니콜라이 1세는 흑해 진출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려고 했습니다. 흑해를 통해 에게 해로 진출하고, 에게 해를 지나 지중해로 나가 서유럽과 교역하고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할 생각이었지요.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흑해를 장악하고 있는 오스만튀르크를 제압해야 했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어떻게 하면 오스만튀르크를 제압할까 고민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한 오스만튀르크였지만 당시는 힘이 많이 빠져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도 전쟁을 하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럴 즈음 오스만튀르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졌지요. 오스만튀르크 영토 내에 그리스도교 성지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이 성지를 16세기 이후 프랑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틈에 그리스 정교들이 관리권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프랑스혁명이 끝난 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오스만튀르크 정부로부터 성지 관리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그것을 물고 늘어졌지요.
“오스만튀르크에는 우리 그리스정교도들이 많다. 프랑스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그곳에 가서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해야 할 권리가 있다. 오스만튀르크 정부는 우리에게 그 권리를 달라.”
그러나 프랑스에게 도움을 받고 있더 오스만튀르크는 러시아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7월 오늘날의 루마니아 땅을 점령했습니다. 이로써 크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오스만튀르크와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스만튀르크가 뚫리면 러시아가 그리스를 지나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긴장한 채 러시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영국, 프랑스, 오스만튀르크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습니다. 이제 연합군이 러시아와 맞붙은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와 연합군이 바로 충돌하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연합군과의 충돌을 우려해 일단 점령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합군이 가만있지 않았지요. 영국과 프랑스는 이 기회에 러시아를 혼내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854년 9월 영국, 프랑스, 오스만튀르크 연합군은 흑해 북쪽 연안의 크림 반도에 약 6만 대군을 상륙시켰습니다. 러시아 해군이 주둔해 있는 세바스토폴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지요.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보급 기지인 발라클라바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주 동안 세바스폴을 포위하고 있는 연합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할 계획이었습니다.
1854년 10월 발라클라바에서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러시아군과 러시아군의 공격을 저지하려는 연합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 기병은 러시아 포대를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뼈아픈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뒀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러시아군은 그 뒤 참호를 파고 그 속에서 전투를 치뤘는데, 한겨울 폭풍우로 참호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영국 쪽도 사정은 같았습니다. 콜레라가 병사들 사이에 퍼져 어떤 날은 싸우다 죽은 병사보다 콜레라에 걸려 죽은 병사 수가 더 많을 정도였지요. 이러한 참상이 영국의 ‘타임’지에 간호사 한 사람이 입술을 깨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간호사 모습이 실렸는데요. 그 간호사는 크림 반도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보살펴 주었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었습니다.
전쟁터로 날아간 한 마리 새
나이팅게일은 1854년 10월 영국 정부로부터 오스만튀르크 주둔 영국 육군 병원 간호사 감독관에 임명되어 간호사 서른여덟 명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로 향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리스 건너편 스쿠타리 해안에 도착한 나이팅게일은 연합군 야전 병원에서 간호 일을 시작했습니다.
야전 병원은 부상병을 일시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전투 지역과 가까운 후방에 설치한 임시 병원인데, 나이팅게일이 일하는 야전 병원은 위상 생태가 무척 형편없었지요. 병실 침대가 부족해 환자들이 병실 바닥과 복도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담요가 턱 없이 부족하고 악취가 났습니다. 병원 식당은 바퀴벌레와 쥐의 놀이터였고, 화장실 시설이 부족해 여기저기 오물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야전 병원으로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나이팅게일은 먼저 부상병들이 쾌적하게 쉴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빗자루와 걸레, 환자용 양발, 바지, 포크와 나이프, 변기 등을 사 달라고 병원에 요구했어요. 병원은 나이팅게일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자기 돈과 여기저기서 보내온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샀습니다. 그리고 병원을 청소하고, 수술실 칸막이를 만들어 병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습니다.
세바스토플을 공격하다가 부상당한 환자들이 나이팅게일이 일하는 병원으로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환자를 돌보느라 밤낮이 따로 없었지요. 밤이면 등불 하나를 들고 병실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이 열은 없는지, 상처가 덧나지 않았는지를 세심히 살폈지요. 어느새 환자들은 이런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천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흑해 진출 실패! 아시아로 눈 돌리다!
1885년 여름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화병으로 죽고, 알렉산드로 2세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해 8월 연합군 함대가 세바스토폴을 함락하자 러시아는 마침내 백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크림 전쟁은 흑해를 통해 남하 정책을 펴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연합군이 맞붙은 싸움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패한 러시아는 파리에서 파리 조약에 사인했습니다. 조약 체결 결과 러시아는 흑해에 함대를 배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흑해는 중립이 선언되어 무역을 하는 배는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었으나 군함은 일체 통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흑해 진출에 실패한 러시아는 이후 중국과 한반도 등 아시아로 진출을 하려고 했지만 이 마저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05년에는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도 패해 제국의 체면을 구겼답니다.
그렇다고 연합군이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러시아가 남진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오스만튀르크가 몰락하는 것을 100년 정도 늦추는 데 이바지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크림 전쟁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각종 발달된 기술들이 크림 전쟁에서 실험적으로 사용되었지요. 첫째는 연합군 해군이 돛단배인 범선이 아닌 증기 기관선을 이용해 전보다 훨씬 쉽게 많은 병사와 물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둘째는 전쟁 소식을 전파를 이용해 전달하는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전신 기술 덕에 런던과 파리 시민들은 전쟁터의 소식을 전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카메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쟁 사진이 각국에 생생하게 전달된 것입니다.
*문제의 크림 반도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 남쪽에서 흑해로 불거져 나온 반도입니다. 흑해는 러시아,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에 둘러싸인 바다이지요. 크림 반도는 현재 인구 2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계 주민이 60%, 우크라이나 주민이 24%를 차지합니다. 크림 반도는 2014년 3월 러시아에 합병되었습니다. 1854년 크림 반도를 통해 에게 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 프랑스 사이에 크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크림 반도 남동쪽 연안에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여 종전 처리 문제를 협의한 얄타가 있습니다.
*크림 반도에서 돌아온 용감한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크림 반도에 도착해 그 자신도 풍토병을 앓았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의 헌신은 그치지 않았지요. 전쟁이 긑나고 런던으로 돌아간 그는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해 제계적으로 간호사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위스인 앙리 뒤낭은 크림 전쟁의 참상과 그곳에서 자기 몸을 받아 훗날 국제 적십자를 창설했습니다. 이 공로로 뒤낭은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21세기 크림 전쟁-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
오늘날 크림 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 심상치 않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같은 편이었습니다. 소련은 히틀러의 침입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전쟁에서 무려 3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이런 희생을 치르고 소련은 독일군을 무찔러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적이 되었지요. 미국은 자유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를 이끄는 나라로 이른바 냉전 시대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냉전이 해체되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대결 구도는 미국의 우세로 판정이 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러시아가 경제와 군사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두 나라 사이에 묘하고도 격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신냉전 시대 또는 냉전 2.0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태가 2014년 발생했습니다. 발생지는 크림 전쟁이 벌어졌던 바로 그 크림 반도입니다. 크림 반도는 15세기 오스만튀르크 지배 이후 1783년 러시아가 병합하면서 러시아 영토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54년 소련 사회주의 연방의 일원인 러시아가 또 다른 소련 연방 사회주의 국가인 우크라이나에 넘겼습니다. 그 뒤 잠깐 크림 반도 자치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소련 연방 해체 이후인 1992년 우크라이나 영토에 편입되었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에 반발했지만 크림 반도 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러시아와의 합병을 96%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하고 정부군과 맞섰습니다.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반군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2015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휴전에 합의했지만 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지요.
친서방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은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러시아가 중동과 발칸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크림 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정복하려 한다.”며 러시아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켜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고, 우크라이나 내 ‘민주 정부’를 지원해 러시아를 견제하려 한 것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발단이다.’라고 미국을 비판했습니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150년 전 그곳에서 벌어진 크림 전쟁이 모습과 많이 닮아 보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