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무렵에 그리스 옆 동네인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가 막 커가고 있었습니다. 로자가 기원전 272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서구 역사의 무대는 그리스 주변 에게해에서 지중해로 옮겨 왔지요. 로마가 세력을 떨치자 그때까지 지중해에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와 충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날 지도에는 카르타고라는 지명은 없지요. 기원전 146년을 끝으로 세계지도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 근방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국가였습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인들이 만든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나라는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지중해 해상을 장악하여 상업도시로 성장해 가장 부강한 도시였지요. 로마 사람들은 카르타고에 사는 이 페니키아 인들을 자기 말로 ‘포에니 인’이라 불렀습니다. 포에니 인들과 전쟁을 벌일 상대는 로마인이었습니다.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로마는 기원전 6세기 말 공화정을 세웠고, 기원전 3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 인은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려 지중해 인근 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를 보면 장화코 앞에 시칠리아라는 섬이 있지요. 로마는 코앞에 있는 그 섬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카르타고도 이 섬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섬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의 분쟁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 쟁탈전을 시작으로 지중해의 패자가 되기 위해 벌인 싸움이 포에니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시칠리아 섬 안에 있는 메시나와 시라쿠사라는 도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두 도시가 각각 로마와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제까지 시칠리아를 넘보고 있던 로마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기원전 264년).
전쟁 초기에는 카르타고가 이기는 듯 보였지요. 카르타고는 대함대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칠리아 섬에 이미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요.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처럼 배를 만들어 수많은 군사들을 배에 태우고 카르타고 배에 접근해 충각으로 카르타고의 배를 공격했습니다. 로마군은 충각 공격에 이어 카르타고의 배에 올라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로마 육군도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로마군은 그리스군처럼 중무장 보병이 주를 이루었는데, 중무장 보병의 약점이 기동성을 보완한 전술로 카르타고 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부유한 평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군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특권이었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의 1차전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기원전 241년).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지요. 그렇다고 전쟁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어요. 그는 아들들에게 로마를 영원히 증오할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맹세하는 아들 가운데 가장 큰 목소리로 로마를 증오하는 아들이 있었어요. 큰아들 한니발 바르카스였습니다. 한니발이 장성해 로마로 진격해 들어갔어요. 이 전쟁이 제2차 포에니 전쟁입니다(기원전 218-202년).
한니발은 지중해로 가는 해상로를 로마가 이미 차단했기 때문에 에스파냐(스페인)와 프랑스를 거쳐 로마로 쳐들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가야 하는 길에는 유럽의 최고봉을 품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한니발은 그 험한 산맥을 넘는데 코끼리 부대를 몰고 갔습니다. 춥고 고된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코끼리들은 거의 다 죽었어요. 출발할 때 5만이던 병사도 반 이상 줄었습니다.
오늘날 한니발을 ‘카르타고의 명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명장답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땅으로 쳐들어가 로마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10만 명과 맞붙었습니다(기원전 216년).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이른바 초승달 작전으로 로마군과 싸웠습니다. 초승달 작전은 전투 대형을 초승달처럼 둥글게 만들어 가운데 볼록하게 나온 부분에 비교적 전투력이 약한 보병을 배치하고, 좌우에 전력이 강한 기병을 배치하는 전술이지요.
한니발은 로마군을 중앙으로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며 로마군을 안으로 끌여들였습니다. 바로 그때 좌우에 있던 기병이 로마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수만 명의 로마 병사들은 한니발 군대에 포위당해 급속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전사한 로마군의 숫자가 5만 명인지 7만 명인지는 기록마다 달라 어느 것이 정확한 수치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치하는 건 로마군 수만 명이 한니발의 초승달 작전에 걸려 섬멸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칸나 전투에서 용케 날아남은 로마 군인 중에 스키피오라는 젊은 병사가 있었어요. 그는 적장 한니발에게 증오와 존경을 동시에 느끼며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칸나에 전투에서 승리한 한니발은 로마까지 진격해 들어가자는 부하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의 원래 목적은 로마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을 견제하여 카르타고와 로마가 공존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죠.
칸나에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남부에서 10여 년 동안 로마군과 전쟁을 벌이던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로 침입한 로마 장군 때문에 고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로마 장군이 바로 칸나에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스키피오였습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을 때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로 쳐들어갔습니다. 돌아온 한니발은 난감했지요. 그에게는 전투를 펼칠 병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니발은 스키피오에게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할 것을 제안했어요.
한니발의 제안을 받은 스키피오는 무시하고 그가 하려던 대로 밀고 나가 결국 한니발 부대와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한니발에게 싸울 병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믿을 만한 코끼리 부대가 있었지요.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희망인 코끼리를 나팔과 호른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제압했습니다. 이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지중해의 패자로 떠오른 로마
북아프리아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기원전 202년)에서 로마가 승리해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카르타고는 또다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다시는 외국과 싸우지 않겠다는 협약에 사인을 해야만 했지요. 이것으로 로마와 카르타고의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어요.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는 이참에 지중해를 사이에 둔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작전을 짰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 옆 동네에 살던 누미디아를 부추겨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카르타고는 방어를 위해 군대를 소집했고,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르타고가 군대를 모은 것은 협약에 위반된다며 카르타고로 쳐들어갔습니다. 카르타고도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지요. 아무리 외국 군대와 싸우지 않겠다는 협약에 사인했지만, 자기 집 안방까지 쳐들어온 적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카르타고 인들은 3년에 걸친 긴 항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와 이집트, 소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며 유럽의 지배자로 떠오르는 로마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카르타고는 끈질긴 저항 끝에 결국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성과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지요. 카르타고 인들은 무참히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3차 포에니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로마가 100여 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카르타고와 싸워 이기는 동안 카르타고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것이 되었습니다.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로 변했다는 표현은 여기에서 생긴 말입니다.
*스키피오와 자마 전투
자마 전투에서 맞닥뜨렸던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이후 한 번 더 만났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때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피로스라고 답했어요. 피로스는 그리스 에피루스 지방의 왕으로 로마군과 여러 번 싸워 이겼으나 최후 전투에서 패해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 때문에 ‘피로스의 승리’라는 고사를 남긴 인물입니다. 한니발은 세 번째로 위대한 지휘관은 자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당신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
자칫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 될 뻔한 한니발을 세 번째 위대한 지휘관의 위치로 밀어낸 스키피오(기원전 236-184년). 로마 장군인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로마 집정관인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로마군으로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하여 겨우 목숨만을 건졌습니다. 14년 뒤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다시 한니발을 만나 그때의 패배를 설욕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승리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대단한 승리에도 그는 훗날 로마에서 그의 정적들에 의해 쫓겨나 농촌에서 밭을 갈며 살다 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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