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 독일, 통일 제국을 향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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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 독일, 통일 제국을 향한 꿈

by &#$@*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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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2대 강국이라면 미국과 중국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이 최대 부유국으로 곱힙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딛고 오늘날 유럽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독일이 유럽의 강국이 된 건 19세기 통일 제국을 건설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1870년까지만 해도 독일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이 모여 있는 연방 국가로 그다지 힘센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독일은 강력한 리더의 등장으로 통일 제국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에 등장한 강력한 독일의 리더는 철혈 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였지요.

 

비스마르크가 태어나고 활약한 19세기 독일 지도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습니다. 큰 테두리는 비슷했지만 오늘날처럼 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크고 작은 여러 제후국이 힘없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모시고 있는 나라였지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있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힘센 나라는 북쪽의 프로이센과 남쪽의 오스트리아였습니다.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여러 나라로 갈라진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이 어서 강대국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당시 독일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에 패해 프랑스와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숙적 프랑스에 복수전을 벼르고 있었고, 독일 연방 가운데 가장 힘이 셌던 프로이센이 복수전을 이끌 적임자로 여겨졌습니다. 

 

프로이센은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어요. 먼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을 맺어 무역을 자유롭게 만들어 경제 부분에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요. 바로 그 시대에 등장한 인물이 비스마르크입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공무원으로 출발해 러시아와 프랑스 대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 대사를 거치면서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움직임에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비스마르크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프로이센을 강하게 만들어 독일 연방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철과 피가 필요하다

1862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자 꿈꿔 오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군비를 늘려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의회 의원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반대했지요. 그러자 그는 의회에 나가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프로이센은 자유보다 군비가 필요합니다. 언론이나 다수결로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철과 피로써만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말은 곧, 지금은 자유니 평등이니 떠들 때가 아니며, 독일을 통일하고 유럽의 강대국이 되려면 오로지 막강한 군사력과 희생이 필요할 뿐이라는 뜻이지요. 

 

비스마르크는 이어 지난 역사를 들먹이며 독일 국민들을 자극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에게 베를린을 점령당한 수모, 그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때 독일이 갈라져 있지 않고 하나의 큰 제국으로 존재했다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비스마르는 의회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며 군비를 늘리고, 군 제도를 개혁하고, 군 병력을 증강해 나갔습니다. 또한 국대 내 규율을 엄격히 하여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어느새 프로이센 군대는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병사, 지원군, 그리고 시민군까지 합해 100만 영이 넘게 되었습니다. 

 

군사력에 자신감이 생기자 비스마르크는 먼저 북쪽 덴마크와 전쟁을 했습니다. 덴마크가 독일 내 홀슈타인을 멋대로 합병하자 덴마크를 혼내 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스트리아로 향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내쫓고 프로이센을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러시아와 프랑스, 이탈리아에 중립 약속을 받은 뒤 1866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승리를 했습니다. 

 

프로이센 의회는 비스마르크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지요. 프로이센 주위에 있던 작은 제후국들도 프로이센 쪽에 붙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패한 오스트리아는 연방에서 탈퇴했고, 마침내 북부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습니다. 

 

이제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를 제압하는 일만 남았지요. 유럽 대륙의 강국인 프랑스만 제압하면 독일 통일도 시간문제가 될 터였습니다. 프랑스는 라인 강 건너편에서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벌이는 이 모든 과정을 대단히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베를린에 있던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적당한 침략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엠스 전보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일어나다

1870년 7월 어느 날 프랑스 대사가 독일 휴양지 엠스에서 휴양 중인 프로이센 왕을 찾아왔습니다. 프랑스 대사는 얼마 전 에스파냐 왕 자리가 비었는데, 프로이센 왕이 자신의 친척을 그 자리에 앉히려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지요. 이에 대한 생각을 베를린에 있는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지요,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반대하는 것을 전쟁 구실로 만들려고 했지요. 일개 대사가 한 나라의 왕에게 큰 결례를 범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신문사에 보도 자료를 냈습니다. 

 

신문을 본 독일 국민들은 프랑스를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한번 해 보자는 식으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의 기획자이자 연출자인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 포고를 해 주니 당연히 좋아했을 겁니다. 

 

당시 프랑스의 군사력은 프로이센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참모총장 몰트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했습니다. 철도를 통해 프로이센 군을 프랑스 국경 지대로 신속히 이동시켰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군은 연패를 거듭했습니다. 프랑스 영토인 메스에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군에 포위당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스당 전투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에 승리한 후 독일이 통일되다

파리를 함락시킨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진 빚을 갚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해체되고, 대신 북부와 남부 독일을 아우르는 독일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독일은 승리한 대가로 30년 전쟁 때 프랑스에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림 자료: 독일의 통일 과정; 출처-세계 사진 자료실
(그림 자료: 독일의 통일 과정; 출처-세계 사진 자료실)

 

알자스로렌 지방은 프랑스 소설가 알퐁소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가 된 곳으로,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두 나라 사이에 늘 문젯거리로 남아 있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독일은 프랑스에게서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았습니다. 자존심이 센 프랑스인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주 나빠졌습니다. 그 덕에 몇 백 년 동안 원수처럼 지내던 프랑스와 영국은 다시 친하게 지냈습니다. 

 

유럽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던 독일은 통일 제국을 이뤄 유럽의 강대국의 자리 잡았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목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간의 삼국 동맹을 맺었지요(1882년). 

 

두 나라의 전쟁 이후 유럽은 이른바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서 20여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후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삼국 협상을 맺었습니다(1907년). 

 

이후 유럽은 통일을 이루고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과 이를 저지하려는 선발 제국주의 나라가 부딪히게 되는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비스마르크가 죽은 지 16만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철혈 정치인 비스마르크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스마르크는 통일 제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독일을 넘어 유럽의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그 덕에 2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독일은 공업이 크게 발달했고, 그의 외교력 덕에 유럽은 얼마간 평화 시기를 맞았습니다.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냉철하고 강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젊은 시절의 한 일화가 그런 그의 일면을 잘 보여 줍니다. 어느 날 함께 사냥을 갔던 친구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자 비스마르크는 손을 내미는 대신 총을 겨누어 쏘려고 했습니다. 친구는 총에 맞지 않기 위해 기를 스고 늪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만약 그때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함께 빠져 죽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그런 그의 냉철함이 독일을 통일 제국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독일의 여러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스당 전투

프랑스 황제가 포로가 되어 프로이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대혁명을 일으키고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혁명을 일으킨 자존심 강한 파리 시민들이었죠. 시민들은 파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 시간 프로이센 군대는 스트라스부르 등 프랑스와 독일 접경 지역을 함락시키며, 파리로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과 비스마르크는 파리 교외에 있는 베르사유 궁에 머물면서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를 어떻게 할지 계획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개와 고양이, 심지아 쥐까지 잡아먹으면서 처절하게 버텼습니다. 하지만 파리를 에워싸고 공격해 오는 프로이센 군을 당해 내지는 못했지요. 1871년 1월 프랑스 임시 정부는 결국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전쟁 이후의 역사: 두 번의 패배를 딛고 독일이 일어서다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유럽의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거푸 패배하는 바람에 거의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었죠. 나라는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졌고, 대부분의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었습니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지구촌 최고의 악인인 히틀러를 배출한 나라, 온 유럽을 전쟁터로 만든 국가, 그리고 유대인 600만 명을 수용소에서 죽인 반인류 국가라는 세계인의 따가운 눈총이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독일은 오늘날 유럽 최고의 부자 나라로 성장했지요. 여기에는 독일 국민들의 타고난 성실함으로 이뤄 낸 소위 라인 강의 경제 기적, 피해국 당사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그리고 부단한 노력으로 분단 45년 만에 이뤄 낸 통일이 그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리한 연합국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조치가 바로 동서 분할이었습니다. 국토는 동서로 분단되고, 동독에 속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지요. 베를린에는 동독 정부에 의해 1961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동독이 장벽을 세운 이유는 수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베를린으로 이주, 혹은 탈출을 했기 때문이죠. 이로써 동독 영토 안에 있던 서베를린은 사방이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앞으로 100년 이상 유지될 것”이라는 동독 총리 호네커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1989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독일인ㄷ르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1970년 대부터 빌리 브란트는 동독과의 화해와 교류를 추진했습니다. 둘째, 미국과 서방 세계의 지원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동독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도 빼놓을 수 없지요. 분단 이후 지금까지 수백 만 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넘어갔고, 동독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결국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요. 마지막으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후 동서 냉전 구도가 완화되었고,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무너진 것도 베를린 장벽 붕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90년 통일 이후 마침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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