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냉전 체제의 대격돌이 한반도에서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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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냉전 체제의 대격돌이 한반도에서 일어나다

by &#$@*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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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군대가 38도 선을 뚫고 남하했습니다.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남과 북의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 수백여 만 명이 희생되었지요. 남한과 북한의 대결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해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체제가 맞붙은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으며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이 어떻게 국제전으로 바뀌었을까요?

 

오늘날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중국의 동의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당시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이념 대립이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따라서 내전으로 시작해 국제전으로 바뀐 한국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미국과 소련, 중국의 이해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 자료: 한국 6.25 전쟁 피난; 출처:ytn
(그림 자료: 한국 6.25 전쟁 피난; 출처:ytn)

 

먼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로 돌아가 볼까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해 식민지였던 우리는 해방을 맞이 했습니다. 한반도가 기쁨의 열기로 뒤덮혔지만 그 열기는 이내 식어버렸습니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외국 군대가 해방군이었는지 점령군이었는지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까지 엇갈려 쉽게 단정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가 주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무슨 생각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들어왔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두 나라는 여러 번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고 일정 기간 동안 신탁 통치한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결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에 들어온 미국과 소련군은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38도선을 설치했습니다. 38도선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대립하는 이념 대립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은 우리 민족은 무척 실망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38도선을 무너뜨리고 통일된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는 바람에 미국과 소련의 결정을 물리칠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연합국이었던 영국 미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에 어떻게 정부를 세울지 논의했습니다. 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이 결정되었습니다.

 

먼저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회의를 개최하며, 연합국이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신탁 통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국내 한 신문에 잘못 소개되는 바람에 남한에서는 극심한 좌우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보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지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물론 사실과 정반대인 오보였습니다. 하지만 남한의 좌익과 우익은 이 오보 때문에 반탁과 찬탁으로 갈려 극렬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우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조건 거부하며 신탁 통치 반대 투쟁에 나섰습니다. 좌익도 처음에는 모스크바 3 상회의 결정에 반대해 반탁 운동을 벌이다가 회의 내용이 잘못 전달된 것을 알고 모스크바 3 상회의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지요. 이때부터 반탁과 찬탁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신문 내용이 오보였다는 것이 밝혀진 다음에도 대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익 세력은 연합국의 신탁 통치를 절대 받을 수 없다며 저항했고, 좌익은 먼저 임시정부를 세운 뒤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이러한 좌우 갈등은 해방 뒤 3년 내내 이어졌습니다. 이런 갈등이 통일 정부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되었지요. 미국과 소련은 회의를 열어 남과 북을 하나로 엮는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는 한편, 극한 대립을 겪고 있는 남한의 좌익과 우익 세력을 불러 좌우 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일부는 분단이 되더라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고, 일부는 단독정부 수립은 절대 안 된다면서 맞섰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 회의가 모두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겨 버렸습니다. 이에 유엔은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마저도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실패하자, 마침내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통한 단독 정부 수립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 결정은 이후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1945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선거는 치러졌고, 국회가 구성되어 헌법이 제정되고, 마침내 8월 15일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에 들어서 단독 정부 

김구와 여운형 김규식 같은 남한의 지도자들은 단독정부가 세워지면 장차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한이 단독정부를 세우자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 북쪽에 정부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남쪽과 북쪽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의 예견대로 남과 북의 두 정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들어선 정부는 달라도 너무 달랐지요.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지향했습니다. 남쪽 정부는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과 일제 시절 친일 행각을 벌였던 인사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친일 반역자를 처벌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요. 친일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활동을 와해시키는가 하면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요직에 기용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라 해방 후 우리 민족 최대 과제였던 친일 청산은 물 건너가고,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빨갱이로 몰려 탄압을 받았습니다. 

 

반면 북한은 정수 수립 전후로 친일 반역자들을 몰아내고, 토지 개혁을 단행해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높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일 전사답게 지나치게 호전적인 게 문제였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전쟁 계획을 설명하고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모스크바와 북경을 몰래 드나들었습니다. 

 

호전적이기는 남한의 이승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걸핏하면 북진 통일을 주장해 미국을 긴장시켰어요. 이렇듯 서로 으르렁대던 남한과 북한은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런 와주에 김일성이 오판하도록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남한에 있던 미국이 군대를 철수한 것이죠. 그러자 북한 김일성은 전쟁이 일어나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는 소련의 지원과 중국의 동의를 얻어내 마침내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한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무너지는 38도선 전쟁이 시작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의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간단히 38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한국군을 휴가 나간 군인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 북한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림 자료: 한국 전쟁 6.25; 출처: yna
(그림 자료: 한국 전쟁 6.25; 출처: yna)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정보의 책임자 이승만은 서울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도피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 갔던 선조와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선조는 앞을 막는 백성들을 뿌리치고 갔다는 것이고, 이승만은 몰래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27일 대전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용맹한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위치를 지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은 유일한 한강 다리인 한강 철교를 폭파해 버렸습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그 폭파로 피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며칠 뒤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 간 북한 인민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 군과 대치했습니다. 국토를 90퍼센트 넘게 차지한 북한군은 그들의 목표에 거의 도달하는 듯했습니다. 이승만은 몸이 달았습니다. 자칫하면 북한에게 나라를 빼앗길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 이후 이승만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군 사령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미군은 유엔 결의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15개국 군인들로 이뤄진 유엔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전시 작전권은 맥아더 사령관에 넘어가고, 남한과 북한의 싸움은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역전의 기회를 모색하던 맥아더는 서해를 따라 북상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쳐 파리를 해방시킨 것처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지나 북진했습니다. 개성과 평양을 점령한 유엔군과 국군은 여세를 몰아 압록강 아래까지 진격했습니다. 이번에는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한반도가 통일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마오쩌둥은 한반도에 중공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개입하자 전쟁 양상은 국제전으로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미군을 밀어냈습니다. 1950년 겨울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해병대는 중공군의 파상 공세에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군은 후퇴를 결정하고 흥남 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서울에서도 또다시 피난이 시작되었어요. 이른바 1.4 후퇴였습니다.

 

 

유엔군과 중공군 참전, 국제전으로

중공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재차 반격을 시도해 1951년 여름 예전 38도선까지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때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돼 전쟁은 길고 지루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져 3년을 이어 온 전쟁이 모두 끝났습니다. 우리 정부는 휴전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휴전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실은 작전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이 미군에 넘어간 상황이어서 휴전 협상 주체로 나서지 못한 것이었지요. 한국전쟁 중 미군에 넘어간 작전권 중 평시 작전권은 50여 년 뒤 노무현 정부 때 넘겨받았지만 전시 작전권은 아직까지 반환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연구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남한에서 주장하는 것과 북한에서 주장하는 게 달라서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요. 하지만 자료를 종합해 보면, 남한 군인은 약 40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북한군과 중공군 사망자는 100만 명이 넘습니다. 민간인도 남과 북에서 각각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행방불명자도 약 150만 명이 넘고, 가족과 헤어진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나 됩니다. 

 

한반도는 남과 북 할 것 없이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공장 같은 산업 시설, 건물, 학교, 집이 잿더미가 됐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가장 큰 상처는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고, 남과 북이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전쟁 중 국군과 북한군은 자기편에 협조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이것 때문에 서로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쌓였습니다. 이러한 원한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남과 북이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전쟁 서로 다른 이름

1950년 남과 북이 충돌한 전쟁을 남한에서는 북한이 전격 침공한 6월 25일을 강조하기 위해 6.25 전쟁이라 부릅니다. 북한은 남한을 해방하려고 일으킨 전쟁이란 뜻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해서 한국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으로 ‘항 미원 조’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면서 내세웠던 ‘항왜 원조’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 전쟁 이후의 역사: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과 북

전쟁이 끝난 한반도에는 38도선 대신 휴전선이 가로놓였습니다. 휴전선은 남한과 북한을 나누는 군사 분계선이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나누는 동서 냉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전쟁 이전에 있던 38도선과 휴전선은 어떻게 다를까요?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건 같은데, 휴전선이 생기면서 전쟁 이후 남북한의 영토가 조금 달라졌지요. 가령 남한 땅이었던 개성은 북한 땅으로, 북한 땅이었던 철원, 화천, 인제, 고성의 일부가 남한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림 자료: 한국 전쟁 6.25; 출처: info rank
(그림 자료: 한국 전쟁 6.25; 출처: info rank)

 

전쟁이 끝난 이후 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 중국이 대립하는 동서 냉전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러한 냉전 구도는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이 외교 관계를 맺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로 냉전 구도가 약해진 이후에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냉전 구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 전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당한 우리와 달리 전쟁의 이익을 얻은 나라도 있습니다. 미국은 유엔 국가 중 가장 많은 군인을 파견해 수많은 전사자를 내는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새로 개발한 무기를 원 없이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미국보다 더 많은 이익을 본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게 한국 전쟁은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원자 폭탄 두 방을 맞고 패망한 이후 경제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기적처럼 부활했습니다. 유엔군 사령부가 한국전쟁에 쓰이는 물자를 거의 다 일본에서 가져다 썼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 전쟁에서 번 돈을 무너진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종전 이후 북한은 김일성 주도하에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1인 독제 체제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들 김정일과 손자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3대가 권력을 세습하는 독특한 체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남한에선 이승만 정부가 전쟁이 끝나고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통해 독재 정권을 유지하려다 4.19 혁명으로 무너졌어요. 그 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군사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박정희는 18년 동안 장기 집권하며 민주화를 억압하기도 했지만 가난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군사 정부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졌습니다. 

 

군사 정권 아래서 국민들은 줄기차게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 정도의 민주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은, 완성되지 않은 민주주의를 완성시켜야 하는 과제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뤄야 하는 숙제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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