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와 유방의 초한 전쟁: 장기판의 초나라와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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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와 유방의 초한 전쟁: 장기판의 초나라와 한나라

by &#$@*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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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를 만들며 대제국 건설에 집중할 무렵,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중국 대륙에서는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의 맹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 중국 사람을 한( )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한나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나라는 초한 전쟁(기원전 206-202년)을 거친 뒤 비로소 제국의 틀을 잡았습니다. 초한 전쟁은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을 일컫는데,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이 유방이 대륙의. 패자 자리를 놓고 벌인 전쟁을 말합니다. 두 나라 중 전력이 우세한 쪽은 초나라였어요. 초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힘이 센 항우가 이끌던 나라였고, 한나라는 별 볼일 없는 유방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항우는 초나라 귀족 출신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힘이 센 장수로 알려져 있지요. 반면에 기운 센 천하장사라고 할 수 있는 유방은 시골 농민 출신의 하급 관리로, 말이 하급 관리이지 실은 백수건달 같은 신세였습니다. 어쩌다가 항우와 우열을 가리게 되는 영웅으로 성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유방의 승리로 끝났지요. 대체 어떤 일일지 알아볼까요?

 

중국은 전설의 왕조인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를 지나 춘추 전국 시대를 맞이합니다. 이때 중원은 진, 초, 제, 한, 위, 조, 연 등의 일곱 나라가 난립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이 분열의 시대를 마감한 사람이 중국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시황제(기원전 221년)입니다. 대륙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운 시황제는 이제까지 쓰던 왕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라는 타이틀을 자기 스스로에게 붙였습니다. 아마 진나라가 건국한 지 15년 만에 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중국 민족은 한족이 아니라 진족이라 불렸을 겁니다. 

 

시황제는 전국을 군현제라는 중앙집권 체제로 정비하에 황제가 파견한 관리들이 군과 현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문자를 통일하고 화폐를 발행하고, 도량형을 통일했습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긴 건축물인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시황제입니다. 

 

만리장성은 그전부터 있던 성벽을 연결한 것에 지나지 않고,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거의 완성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항제가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만리장성을 쌓지 않았다면 중국이 가장 자랑하는 관광 상품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진나라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오늘날 중국의 영어식 호칭인 차이나도 진나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황제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요. 그는 강력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고, 아방궁 등 무리한 토목 공사를 강행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나머지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그는 진 제국의 스타일에 반하는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자신을 비판하는 유생 400여 명을 산 채로 묻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입니다. 그가 죽자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항우 집안이 대표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진나라 말기 반란이 구심점이 된 항우

항우는 옛 초나라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항량의 손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무예 실력이 출중했답니다. 항량은 항우의 이런 모습을 알아봤지요. 항우와 항량의 반란군 세력이 커지자 그 밑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유방이었어요. 유방은 초나라 출신 농민 출신으로 반란군이 되기 전 시골 현의 하급 관리였어요. 그가 어느 날 죄수들을 이끌고 토목 공사를 하였는데 죄수들이 힘들다고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방은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아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오합지졸 농민들과 죄수들을 이끌고 항우의 세력 안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항량은 조카인 항우의 전투력에 힘입어 점차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러더니 옛 초나라 왕족 하나를 어디서 구해다 왕으로 삼기에 이르렀지요. 항량에 의해 왕이 된 회왕은 항우와 유방 가운데 누구를 중용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젊은 패기와 무력은 항우가 앞섰지만 유방은 항우에게 없는 부드러움과 치밀함이 있었습니다. 회왕은 두 사람에게 제안을 했어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먼저 차지하는 자를 함양의 왕으로 봉하겠다.” 항우는 북쪽으로 유방은 남쪽 길로 각각 함양을 향해 진격 했습니다. 항우는 진나라 관군을 격파하며 열심히 북진했지요. 반면 유방은 별다른 싸움 없이 함양을 향해 갔어요. 결과는 유방이 항우보다 먼저 함양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항우는 한 달 뒤 함양 근처에 다다랐습니다. 항우가 볼 때 유방은 출신이 허접하고 힘도 없도 군대 규모도 적어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존재였어요. 항우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정예 병사 40만 명이 있었습니다. 유방은 겨우 10만 명 정도였어요. 항우는 유방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유방은 먼저 와서 함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항우가 도착하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항우가 함양 근처 홍문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자신을 그곳으로 ,부르자,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사과하는 형식으로 항우에게 가기로 했습니다. 

 

그림 자료: 초한 전쟁의 배경 지도
(그림 자료: 초한 전쟁의 배경 지도)

 

홍문의 모임에서 유방을 제거하려는 항우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어요. 범증은 유방을 홍문으로 불러 기회를 봐서 유방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잔치 자리가 마련되고 술잔이 돌았어요. 항우 쪽 자객이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천막 안은 긴장감이 팽배해졌습니다. 항우가 명령만 내리면 춤을 추던 무희는 칼을 들어 유방을 내리칠 기세였습니다. 유방은 바람 앞에 선 촛불 신세였어요. 위기의 순간, 유방의 참모인 장량이 유방의 호위 무사인 번쾌를 불렀습니다. 힘이 장사였던 번쾌는 항우 앞에 당당히 나가 큰 바가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유방을 해하려는 항우를 대놓고 질책했습니다. 항우는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어요. 항우답지 않은 태도였지요. 역사가들은 이때의 항우를 우유부단하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항우는 아마 유방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자만심에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유방은 참모 장량과 호위 무사 번쾌의 기지와 배짱으로 그날 홍문에서 탈출했습니다. 범증이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추격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거지요. 

 

이른바 홍문의 모임(홍문지회 혹은 홍문의 연이라 부르는) 사전 이후 항우는 서초의 패왕이 되었어요. 오늘날 항우를 초패왕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항우는 겨우 살아 돌아간 유방을 변방 지역인 나라의 왕으로 봉했어요. 이 때문에 유방을 한나라의 건국자라고 부른답니다. 

 

서초 패왕이 된 항우는 진나라 수도의 궁궐과 왕릉을 파괴하고 약탈했어요. 그는 초나라 귀족 출신으로서 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유방이 함양에 들어갔을 때 진나라 왕을 그대로 살려 주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 준 것과는 대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항우는 급기야 의제로 높여 부르던 회왕을 부하를 시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중원에서 밀려나 한나라 왕으로 있던 유방은 항우가 의제를 살해하자 신하가 황제를 시해하고 권력을 빼앗았다며, 그것을 구실로 항우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구실일 뿐 사실은 유방이 차지한 땅이 척박해서 유방이 이에 불판을 품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죠. 그즈음 유방뿐 아니라 다른 여러 제후국의 왕도 항우에 대항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초한 전쟁의 시작과 끝

기원전 206년부터 202년까지 펼쳐진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 왕 유방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초한 전쟁이라 부르지요. 초한 전쟁은 오늘날의 장기로 남아 있습니다. 힘과 전력이 우세했던 항우지만 결국 유방의  한나라에 패해 장기에서도 한나라 쪽이 상수(남보다 뛰어난 수나 솜씨)가 됩니다. 

 

그림 자료: 유방
(그림 자료: 유방)

 

그럼 변방의 유방이 어떻게 초패왕 항우를 이겼을까요? 

유방에게는 뛰어난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항우의 부하 장수였는데 항우는 출신이 비천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요. 그가 바로 유방에게로 가서 항우를 제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한신입니다. 한신이 이끄는 군대가 함양을 기습 점령하자 여러 각지의 제후국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던 항우가 급히 말머리를 돌려 유방 군대를 공격했지요. 결과는 항우 군대의 승리였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항우 군대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원래 정면으로 맞붙으면 항우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한나라 군대였기에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항우의 반격으로 한나라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유방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사이 유방의 아버지와 부인이 항우에게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방은 각지에 흩어진 병사들을 모다 항우를 공격했는데, 전면전보다는 주로 게릴라전으로 대항했지요. 정면 승부를 원하던 항우는 유방에게 여러 군사와 백성들 고생시키지 말고 둘이 만나 결판을 내자고 제의했어요. 하지만 유방은 머리로는 싸워도 힘으로는 싸우지 않겠다며 항우의 화를 돋우었습니다. 포로로 붙잡힌 유방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협박을 해도 유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항우는 유방에게 점령 지역을 나누기로 하고 포로를 돌려주며 휴전을 제안했습니다. 유방이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둘 사이는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유방은 휴전 협정을 깨고 항우 군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수십 만 대군으로 항우 군대를 공격하자 초나라 군대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라 장수 한신은 항우를 해하(안휘성)까지 밀어붙였어요. 해하에서 한나라 군대는 항우를 포위한 채 병사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 고향을 그리워하는 초나라 장수들이 잇따라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우는 탄식했지요. “어느새 고향 사람들까지 한나라의 병사가 되었단 말인가?” 사면초가이었지요.

하지만 항우는 항복하지 않고 수십 만 한나라 군대의 포위를 뚫고 고향을 향해 달렸습니다. 오강이라는 강가에 이르자 항우는 남은 병사를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고향으로 도망가자고 청하는 부하도 있었어요. 하지만 항우는 많은 부하를 잃고 살아 돌아간다 해도 자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거부했습니다. 

 

유방이 항우를 이긴 이유

항우는 강가에서 자신의 애첩 우희와 애마 추를 보며 시를 시어 불렀답니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이 세상을 덮건만

때가 불리하니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할까?”

 

시를 마친 항우는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했습니다. 이로써 5년을 끌던 초한 전쟁은 항우의 패배로 끝이 나고 맙니다.

 

별 볼 일 없던 농촌의 관리 출신 유방은 어떻게 중국 역사상 가장 힘세고 용맹한 항우 군대에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당사자들의 힘은 물론이거니와 객관적인 전력은 항우 쪽이 단연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신의 힘을 너무 믿었습니다. 부하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의심이 많았지요. 참모였던 범증조차 의심해 내쳤습니다. 이것이 뼈아픈 실수였습니다. 범증이 홍문의 모임에서 유방을 제거하라고 건의했을 때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요. 그때 유방을 제거했더라면 결과는 아마 달라졌을 겁니다. 또한 항우는 지나치게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산채로 묻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의제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해 여러 제후국 왕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럼 유방은 어떠했을까요? 

항우의 생각대로 유방은 보잘것없는 신분에 오합지졸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용인술이 있었어요. 뛰어난 지략가 장량과 살림꾼 소하, 그리고 맹장 한신이 유방을 도왔습니다. 유방은 머리와 힘을 빌릴 줄 알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아량이 있었지요. 이런 이유들로 유방은 자신보다 힘과 전력이 우세한 항우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초한 전쟁에 승리한 유방은 진시황이 시행했던 군현제와 진나라 이전 봉건제를 섞어 제국을 다스렸어요. 핵심 지역은 자신과 친족이 다스리고, 먼 변경은 제후국에 맡겼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를 이은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통일 왕조이며, 400여 년을 이어오며 중국 민족을 대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튄 불똥, 항우와 의제 사건

항우가 의제를 살해한 사건이 1700여 년 뒤 조선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실록 편찬을 맡은 김일손이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실록에 넣으려 했습니다. 조의제문이란 항우에 의해 살해된 의제를 추모하며 애도한 글인데, 조의제문을 통해 수양대군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려 한 것이었지요. 당시는 세조 때부터 득세하기 시작한 훈구파와 유학자인 사림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실록에 넣으려 하자 훈구파가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연산군은 할아버지인 세조를 비판하는 그 글에 분개해 조의제문을 실록에 넣으려는 김일손을 처형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시행했어요. 아울러 다른 사림들도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습니다. 1498년 벌어진 이 사건을 무오년에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하여 무오사화라 부릅니다. 

 

 

* 한나라 건국 3명의 공신: 장량, 소하, 한신

열세에 있었던 유방이 초패왕 항우를 이기고 한나라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방의 핵심 참모인 장량, 소하, 한신의 힘의 컷다고 할 수 있지요. 뛰어난 지략가였던 장량은 홍문연에서 유방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지략을 발휘해 유방을 구했습니다. 훗날 당나라 태종이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입하고도  정복하지 못한채 부상당해 돌아왔는데, 그때 당 태종은 “내게 장량이 있었다면 고구려 원정을 말려 괜한 고생을 안 하게 했을 것이다.”라며 유방에게 장량 같은 참모가 있는 걸 부러웠했답니다. 후날 사람들은 유방이 장량을 부린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통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장량을 높이 평가했지요. 

 

소하는 유방이 살던 현의 관리였는데, 반란을 일으켜 유방을 현령으로 세웠습니다. 이후 유방 군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으며, 군수 물자 보급에 탁월한 공을 세웠지요. 소하는 전쟁이 끝난 뒤 전장의 장수들보다 높은 일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한나라 건국 후에도 내정 일체를 맡아 유방을 도왔습니다. 장량과 함께 한신을 적극 추천한 것도 소하였습니다. 한신은 원래 항우의 부하였으나, 푸대접을 받자 장량의 권유로 유방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초한 전쟁을 결정지은 하해 전투에서 항우를 제압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처형당하는데,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을 인용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전쟁 이후의 중국 역사: 한나라 이후의 2천년 중국사

한나라는 기원전 202년부터 멸망할 때인 서기 220년까지 약 400년 동안 제국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한나라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쌍벽을 이루는 번영의 시대를 누렸습니다. 유학이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아 중국이 유교 나라가 되는 바탕이 되었지요. 오늘날 중국 민족을 일컫는 한족, 중국 문자인 한자도 한나라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망하려면 여러 조짐들이 타나나지요. 한나라 말기에 이르자 환관들이 멍청한 황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국정을 농간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치가 타락하고 부패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여기저기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수습할 수 없는 지역에 이릅게 됩니다. 결국 220년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유비, 손권이 패권을 겨루는 삼국 시대가 펼쳐집니다. 

 

조조의 위나라와.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서로 경쟁하던 삼국 시대는 280년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됩니다. 하지만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했지요. 중국은 다시 대분열하고 혼란의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삼국 시대 이후의 중국을 위진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때 중국 남쪽은 한족이 세운 나라가 들어서고, 북쪽은 소위 5호 16국이라 불리는 여러 나라가 난립하는 혼란기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분열은 589년 수 문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 됩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618년 당나라에게 멸망합니다. 당나라는 약 3백 년 동안 제국을 이어 갔는데, 당 태종은 옛 한나라 때 영광을 되찾기 위해 안팎으로 노력해 강한 나라를 만들었어요. 당 태종은 고구려를 수차례 침입해 우리 민족을 어려움에 빠뜨렸어요. 결국은 그의 아들 고종 때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도 내부 반란으로 무너지고 송나라가 뒤를 이어 세워집니다.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지요. 금나라는 몽골에 의해 밀려나 중국 대륙은 몽골이 차지하는 원나라 시대를 맞이합니다. 원나라 이후 한족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원을 몽골 초원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도와 참전했다가 국력이 쇠하여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청나라는 200여 년 동안 중국 대륙을 통치하다가 서양 세력이 밀어닥친 19세기에 급격하게 힘을 잃고 1912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제국의 문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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