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솔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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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솔거의 죽음

by &#$@*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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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솔거의 죽음] 조정래 작가의 작품입니다. 진실한 삶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지요. 이야기에 나오는 성주는 자신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아무나 파직을 시키고 귀양을 보내는 폭군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덕이 높아 백성들이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지요. 그러고는 백성들이 자신의 은공에 보답할 기회를 주겠다며 자신의 영정을 그리게 합니다. 성내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는 성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립니다.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려 낸, 다시 말해서 흉물에 가까운 영정을 성주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하들 또한 죽음이 두려워 성주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성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 화가만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읽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봐라, 이 성내에 쓸 만한 환쟁이가 있느냐?” 어느 날 성내를 조망하고 있던 성주가 별안간 물었습니다. “환쟁이라니요…?” 성주 옆에 붙어 서 있던 신하고 반문했고, 둘러선 다른 사람들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어요. “환쟁이를 몰라서 그러는 게냐!”모두가 움찔했습니다. 성주의 음성에 노기가 묻어난 때문이지요. 눈치없이 데데하게 굴다가는 그 불덩이 같은 성미가 폭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에겐가 불똥이 튈 것이고, 그 세례를 받은 자는 재수가 좋아야 파직이고, 운수가 꼬이면 볏짚 깔고 벽 바라보고 앉아서 [사미인곡]을 읊는 처량한 귀뚜라미 신세가 될 판이었습니다. 예예, 있구말고요. 새가 금방 후드득 날아갈 듯이, 호랑이가 금방 우르릉 울 듯이, 사슴이 금방 깡충 뛸 뜻이, 있는 대로 보는 대로 그려 내는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환쟁이가 있사옵니다.” 한 신하가 연상 눈알을 뒤룩거리며 가며 아뢰었습니다.

 

“후드득 날고, 우르릉 울고, 깡충 뛰게 하는 귀신 같은 솜씨라… 그게 사실이렸다!””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 짧은 혀로 거짓을 고하오리까.” 얼굴이 상기된 신하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를 곧 불러들이도록 하라.” “예에… 하온데….” 모두들 엉거주춤한 눈길을 하하며 성주의 얼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성주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신하들을 한 차례 휘 훑어보았어요. “성내의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내 덕을 칭송하고 있다는 그대들의 전언은 사실과 추호의 차이도 없으렷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모두는 가락을 맞추어 합창하며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지요. “자알 알겠노라.” 성주는 뒷짐을 지며 신하들로부터 눈길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실눈을 뜨고 멀리 성내를 굽어보는 것이었어요. 그런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넘쳐나서 처져 내린 양쪽 입 꼬리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듣거라, 그대들이 전언하는 바대로 성내의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내 덕을 칭송함에 있어 내가 그들에게 어떤 답례를 내릴까 골똘히 생각하던 중 묘안이 떠올랐느니라. 그들의 극진한 칭송에 대한 답으로 내 영정을 현치문 앞에 걸도록 함이니라.” “과연 현안이시옵니다.” “성주님의 은혜 하해와 같사옵니다.” 이러면서 신하들은 서로 질세라 제각기 한마디씩 아뢰기에 바빴어요.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후회의 빛이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당일로 불려들여져 성주 앞에 읍했습니다. “네가 바로 신기를 지녔다는 환쟁이렷다!” 버티고 앉은 성주가 다짐을 놓았어요. “황공하옵니다.” 그는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지요. 성주는 화가의 임무가 아주 막중하니 명심하도록 명령하면서 얼마나 걸릴지를 물었습니다. 화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대략 열흘쯤 걸릴 거라고 대답했어요. “어허, 그렇다면 열흘 내내 내가 네놈 앞에서 장승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성주의 언성이 파도를 일구었습니다. “아니옵니다. 단 한순간도 소인의 앞에서 자질 잡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주님께서는 소인을 전혀 개의치 마시옵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거동을 하시면 되옵니다. 하오면 소인이 성주님의 이런저런 모습을 세밀히 관찰한 다음 정리하여 화폭에 재현시킬 것이옵니다.” 그는 동요되는 빛이 없이 담담하게 말했어요. “허허, 역시 소문대로 신기를 가진 모양이로구나. 그럼 오늘부터 일을 시작하도록 하여라.” 성주는 흡족한 웃음을 피웠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먼 발치에서 성주를 지키기 시작했어요. 그 위치는 성주의 좌측일 때도 있었고, 우측일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 정면일 때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 그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거나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는 것이었지요. 그의 이런 행동은 성주가 잠을 깨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그는 성주 앞에 불려 갔어요. “아직 먹 한 번 찍지 않았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내 앞에 한번 한 약속은 두 번 다시 바꿀 수 없느니라. 만약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시에는 어찌 되는지 알고 있으렷다!”성주는 심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소인 잘 알고 있사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어요. “어허,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앞으로 며칠이나 남았다고 심려를 안 한단 말이냐!”성주는 눈을 치켜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주는 환쟁이의 태도부터가 비위에 거슬렸어요.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도무지 그 그 꼴인 것이었지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손한 것은 더구나 아닌, 그러면서도 어디라고 딱 꼬집어 낼 수 없는 기묘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소인의 솜씨 비록 미천하오나, 처음 아뢰었던 날까지는 기필코 완성할 것이옵니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 박아서 말했어요. “어김이 없으렷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느 안전이라고 두말을 하오리까.” 이렇게 성주 앞을 물러나오고서도 그는 이틀을 더 성주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화가가 식사를 마치고 명상에 잠겨 있는데 우두머리 신하가 나타났어요. “어쩐 일이십니가?” 인기척에 눈을 뜬 그가 우두머리 신하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졸고 있었소?” 우두머리 신하가 혀를 끌끌 차며 퉁명스럽게 물었지요. “그럴 리 있습니까. 건강이 남달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자리를 깔지 않은 채 눈을 붙이는 좀스러운 짓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조는 차디찼어요. “물론 그래야지요. 중임 중에 중임을 맡은 몸으로 앉아 조는 것은 천박한 행동을 해선 안 되지요.” 우두머리 신하는 남의 거처에 불쑥 나타난 자신의 무지하고도 경망한 행동을 쑥스러워하기는커녕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훈계를 하고 있었어요. 불필요한 살람과 마주 앉아 시간을 빼앗기는 것, 특히 명상하는 시간을 토막 내게 되는 경우엔 딱 질색이어서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어요. “어떻게 하실 참이오?” 우두머리 신하의 어조는 사뭇 심문조로 말했어요.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침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욕을 느끼면서 무엇을 말하는지 되물었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요?” “몰라서 묻는 것이요?” 우두머리 신하는 뒷짐을 지고 버티고 선 채 백지일 뿐인 커다란 화폭에 시선을 꽂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어금니를 꽉 물을 뿐이었습니다. “말을 물었으면 대답이 있어야 할 게 아니요.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되길래 어떻게 태평하게 앉아서 날만 보내고 있는 거요?” 우두머리 신하는 이마에 핏줄이 오르도록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의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자기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의 집 언저리에는 경멸의 웃음이 보일 듯 말 듯 어렸습니다. “난 기인이 아니기 때문에 목은 하나밖에 없지요. 그 하나밖에 없는 목을 이 정도의 일을 맡아 가지고 내놓을 만큼 헐값은 아닙니다. 내 목숨 귀한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그다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개나 돼지도 제가 안 먹으려 하는데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하물며 사람이 아무리 환 칠을 해 먹고살긴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가진 자가 짐승만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무례한 것 같으니라고!” 우두머리 신하는 씩씩거리며 한 마디 남기고 옷깃을 펄럭이며 나가 버렸어요.

 

 

이레째 되는 날, 화가는 비로소 붓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성주의 모습이 환하게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마음먹은 대로 성주의 모습을 수천 조각으로 나눌 수도 있고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한 부분을 실물보다 크게 확대시킬수도 있었고 작게 축소시킬 수도 있었어요. 붓을 대기 시작한 그는 잠자거나 먹는 것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했답니다. 그의 청을 받아들인 성주가 명령을 내린 탓으로 그가 기거하고 있는 방에는 세끼 밥을 시중드는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흘 만에 파리해진 모습으로 방을 나왔어요. 약속대로 만 열흘 만에 성주의 영정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는 마치 술에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성주 앞에 나섰어요. “어서 펼쳐 보아라.” 성주가 다그쳤고 그는 읍을 하고 나서 받쳐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신하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들이 되었습니다. 그림은 하반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림이 펼쳐져 감에 따라 실내에는 농도의 색깔이 다른 침묵이 쌓여 갔습니다. 목이 나타나고 턱, 입, 코, 눈, 이마를 거쳐 머리 부분이 나타나려 할 때였어요. “요런 고약한 놈, 당장 치워라!” 성주가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모두는 소스라진 표정으로 딱 굳어졌고 실내에는 순식간에 살얼음이 끼었습니다. 다만 화가 혼자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주를 올려다본 채 계속 두루마리를 들어 있었어요. 

 

“이놈, 귀가 먹었느냐. 당장 치우라니까, 당장!”성주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어요. “어언 분부이시옵니까, 성주님.”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어요. “몰라서 묻는 거냐, 이놈! 네 놈 눈깔에는 내가 그처럼 흉물로 보이더란 말이냐. 요런 발칙한 놈아.” 성주는 곧 쫓아 내려올 듯이 팔을 쳐뻗어대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 순간 화가는 끝도 없는 벼랑을 의식했어요. 한 발짝만 물러서면 그대로 곤두박이고 마는 벼랑,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소인의 재주가 워낙 모자람을 잘 알고 있사오나 붓을 들어 화폭에 그림을 그릴 때만은 추호의 거짓도 없이 티끌만큼의 잡념도 없이 마음을 다스리옵니다. 하옵고, 비록 그림이 다 되었다고 하나 어느 한 구석이라도 미진하거나, 선 한 가닥이라도 거슬리면 결코 타인 앞에 내놓지 않사옵니다. 하물며 성주님의 영정을….”

 

 

“닥쳐라 이놈아! 감히 어디라고 주둥이를 나불거리느냐.” 벌겋게 핏발이 선 성주의 두꺼운 볼이 씰룩거렸어요. “황공하옵니다만 좌중에 물어 주실 것을 소인 감히 소청드리옵니다.”그는 신념 어린 눈빛으로 성주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당돌한 놈같으니라구….” 성주는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으며 신하들을 휘 둘러봤어요. 그가 끝을 받쳐 들고 있는 커다란 족자에는 실물 크기의 세 배에 가까운 성주의 좌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칼만 가까이해도 쫙 벌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살이 쪄오른 볼, 살에 밀려 거의 닫힐 위기에 몰려 있는 가느다란 눈, 뚱뚱한 몸집의 체면을 손상하기에 제격인 채신머리없이 달라붙은 염소수염, 몸집을 닮아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세상 넓은 줄만 아는 펑퍼짐하게 퍼져버린 코, 그 장대한 욕심을 먹여 살리기에 안성맞춤인 두껍고도 큰 입, 어느 부분이든 실물과 너무나 똑같았어요. 더구나 전체적으로 발산하고 있는 분위기는 여지없이 성주 그대로였습니다. 

 

 

흡사 무더위처럼 어디선가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심술이라든가 땀 냄새처럼 끈적끈적하게 묻어나는 것 같은 탐욕스러움은 영락없이 살아 움직이는 성주였습니다. “네 놈 소원이 정히 그렇다면 한 사람씩 의견을 듣도록 하겠다. 허나 만약 한 사람이라도 네놈의 말과 다른 이가 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래도 자신 있는가?” 성주가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물며 싸늘한 경고를 내던졌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는 성주를 똑바로 응시하며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어요. “방자한 놈 같으니…. 여봐라, 그대들은 차례로 저 그림을 보고 그 느낌을 숨김없이 아뢰도록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한 사람씩 성주의 영정 앞에 읍을 했습니다. “아뢰옵기는 황공하오나, 저건 성주님의 영정이 아닌 줄 아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성주님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음이 사실이옵니다.” “소인의 눈도 마찬가지 옵니다. 어찌 성주님의 모습이 저러하오리까.”그의 눈은 이제 이글이글 타고 있었어요. “네 이놈! 귀가 뚫렸으니 빼놓지 않고 다 들었으렷다. 그래도 더 할 말이 있느냐!” 성주는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령했습니다.

 

화가는 눈을 감았다가 떴습니다. 그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모든 것을 정리했지요. 중론을 듣고자 했던 것은 어리석고 어설픈 투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어요. 조금도 동요의 빞이 없이 꼿꼿하게 일어선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모두의 말이 다 옳습니다. 하오나 매일 아침 당경을 보셨을 때 당정도 그런 말들을 했사옵니까. 분명 당경만은 그런 거짓을 고하지 않았으리라 믿사옵니다.” 그의 눈은 이제 훨훨 불이 붙고 있었어요. “저, 저놈이… 저놈을 당장 하옥시키도록 하라.” 성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의 팔에는 결박이 지어졌습니다. 

 

 

화가는 다음 날 성주 앞에 불려 나갔어요. “네 놈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보여 주기 위해 끌어냈느니라. 이제부터 네놈과 같은 환쟁이의 말을 똑똑히 듣고 네놈의 죗값이나 기다리렷다.” 성주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었어요. “아니….” 자신이 그린 성주의 좌상이 걸린 앞에는 지루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지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지루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요. “너는 어서 그 그림에 대한 느낌을 거짓 없이 고하도록 하라.” 성주가 명령했고, “네에에, 그리하오리다.” 지루는 크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긴 말씀을 드리면 성주님께서 피곤하실 것인즉 간단히 요약할까 하옵니다. 저 그림은 성주님을 욕보이려는 의도적인 흉계로 제작되었지요. 사실을 조작, 왜곡하고 있음을 냉정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 말이 사실이렷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소인의 목숨은 둘이 아니오라 오직 하나일 뿐이옵니다.” 지루는 연방 머리를 굽실거렸지요. 그의 매서운 눈초리는 무수한 불화살이 되어 지루의 몸뚱어리에 꽂히고 있었습니다. “저것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럼 그대는 사실을 사실대로 그려 낼 수 있겠는가.” “황송하옵니다. 소인의 재주 별로 보잘것없사오나 감히 저런 흉계는 꾸미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닷새면 족할 것이옵니다.” “닷새라니? 저놈은 열흘이 걸렸어도 저 모양을 만들었느니라.” “뜻이 바르지 못했사온데 스무날이 걸린 들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과시 네 말이 옳다. 당장 이 시각부터 일을 시작토록 하라.” “황공무지로소이다.” 지루는 이마가 발등에 닿을 지경으로 깊은 읍을 했습니다. “그놈을 끌어내라!” 그는 일으켜 세워져 등을 떠밀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루에 불화살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루가 줄곧 외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눈길은 마주치지 않았지요.

 

 

화가는 다시 옥에 갇혔어요. 그는 멍한 시선으로 돌벽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선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지요. “아니, 스승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며 두어 발짝 앞으로 다가갔어요. 그러나 스승님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때묻은 돌벽만 앞을 막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옛 추억에 잠겼어요.

 

‘화가의 스승은 그와 지루,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칠 만큼 다 가르쳤다고 일렀습니다. 스승으로선 가르칠 게 더 없으니 앞으로는 실제 사물을 보고 느끼고 그 느낀 점을 자기의 것으로 다시 나타내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림은 손재주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마음에 깊은 느낌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일렀습니다. 재주란 사람으로 치면 뼈대와 같은 것이고, 거기다가 살이 붙어야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했지요. 앞으로는 그들의 재주에다가 살을 붙이는 일을 지치지 말고 해야 피가 통하고 혼이 담긴 그림이 되는 법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고 스승은 어느 때 없이 이런 가르침을 주며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사방으로 흩어 보냈습니다. 화가는 지루와 짝이 되어 관동 지방으로 가게 되었지요. 한 달 동안에 자유로 선택한 소재로 열 장을 그려야 했고, 지역마다 스승님이 지정한 풍경을 찾아내어 완성시켜야 하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지요. 설악산과 경포대 사이에 낙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다에 면한 벼랑 끝에 해송이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내비치는 일출이 장관이었지요.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개인 날의 일출을 그리도록 한 것입니다. 매일이 강행군이었습니다. 걷다가 마음이 끌리는 퐁경이 있으면 화필을 잡았고 그것이 어지간히 틀을 잡게 되면 다시 걷는 일정의 연속이었지요. 

 

보름이 넘어 낙산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지루는 다음 날 신새벽부터 해변가 벼랑을 향해 어둠을 헤치기 시작했어요. 일출을 기다리는 둘의 위치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둘은 숙식을 같이하며 타향을 떠도는 몸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서로 냉정하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지요. 첫날부터 넷째 날까지 구름이 끼어서 일출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는 갈 길이 멀어 그만 떠나자고 했지만 지루는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지루의 말에 하루를 더 기다려 보았지만 구름이 약간 걷혔지만 그리기에는 마땅치 않은 일출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장을 챙길 수밖에 없었지요. 

 

그 둘이 집에 당도한 후 하루 이틀 쉰 다음에 그들이 그린 그림들을 스승님께 올렸습니다. 스승님이 눈여겨보는 그림은 제자들이 자유로 그린 열 장이 아니라 당신이 지적한 한 장의 그림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는 지루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림 뭉치를 받들었습니다. 스승님은 지루의 그림부터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펴나갔어요. 그도 숨길을 가다듬으며 지루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림마다 예사로 보아 넘길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지루의 재주가 번뜩이고 있었어요. 그림이 바뀔 때마다 스승님도 입을 꼭 다문 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스승님의 미간에 잡히는 잔주름은 그때그때의 놀라움을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었어요. 마지막 한 장, 스승님이 지시한 일출의 그림이 펼쳐졌을 때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한 장의 종이 위에는 천연하게 불붙어 타고 있는 하늘과 바다, 그 사이에서 이글이글 제 몸을 사르고 있는 불덩이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어 놓고 있었지요. 아직 표구도 하지 않은 그림인데도 색깔이 펄펄 살아서 뛰고 있었습니다. 흡족한 미소가 겹으로 물굽이를 이루는 스승님의 얼굴이 자꾸 흐르게 흔들리는 것을 의식하며, 그는 정신을 다잡으려고 속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스승님의 손에서 그의 그림들이 차례로 펼쳐졌어요. 그림이 바뀔 때마다 그는 심한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그림이 펼쳐졌어요. 현란한 체색의 일출이 있어야 할 거기에는 백지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순간 스승님의 얼굴이 번쩍 들렸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쳤어요. 그 눈에는 노여움과 꾸지람과 실망과 의혹이 돼 엉켜 있는 듯했지요. “소인의 눈에는 스승님께서 일러 주신 청명한 일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이 말을 했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곧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그는 꼬박 이틀을 침식을 잃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혐오감에 시달리며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사흘째 되는 날 스승님이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지요. “난 네가 내놓은 백지에서 지루의 것보다 몇 배 훌륭한 일출을 보았느니라. 넌 크게 될 것이야. 꺾일망정 휘어지지 않는 심성을 지녔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내 문하에 남도록 해라. 내 힘에 기울기는 하다만.” 그는 스승님 앞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오열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던 그 말씀을 드디어 자신이 받들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옥에 갇힌 그는 그날부터 침식을 완전히 끊어 버렸습니다. 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눈을 내려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며칠 동안 그렇게 앉아만 있었습니다. 

 

 

밤낮없이 그림 그리기에 혈안이 된 지루는 약속했던 대로 닷새 만에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지루는 그와는 달리 아예 족자를 긴 대나무에 양쪽을 매달아 펼쳐 들게 해서 성주 앞에 나타났습니다. “과연 그대의 솜씨가 신기로다. 어쩌면 그렇게 솜씨가 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훌륭한지고, 훌륭한지고.” 성주는 기쁨을 미처 가누지 못했고, “과찬이시옵니다. 과찬이시옵니다.” 지루는 득의에 찬 눈을 번뜩이면서도 겸손을 지어 보였습니다. 성주는 기쁜 나머지 신하들에게도 보여 주면서 차례로 구경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본 신하들은 모두는 머리를 조아리며 합창했습니다. “바로 저 모습이 성주님의 참모습인 줄 아뢰오.”라며 찬양했지요. 성주는 기뻐하면서 화공에게 후한 상금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루가 그린 영정을 내일 아침 내다 걸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족자에 그려진 얼굴은 얼핏 보아서는 생판 딴사람이었지요. 우선 삐져나오도록 살이 찌지 않은 게 그랬습니다. 그리고 눈도 서글서글했고, 입술도 미련스럽게 투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심술이나 탐욕스러움 대신 미풍 같은 미소가 번져가는 속에 한없이 인자하고 후덕한 기운을 훈훈하게 풍기고 있었습니다. 흡사 부처님이 의관 정제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었지요.

 

 

 

엿새 째 되는 날 새벽에 그는 몸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간수에게 물 한 통을 청해 얼굴과 손발을 말끔히 씻어내었지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도 풀어내려 물을 묻혀서는 가지런히 손질을 했습니다. 그는 물통을 내보내고 다시 벽을 향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지요. 진정 40평생 그림에 미쳐 살아온 나날이었어요. 그림을 찾아 한정도 없이 유랑했고 그림을 쫓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넜습니다. 화폭에서 밤이 밝고, 하나의 그림 속에 어뚱 하게 긴 세월이 묶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승도 부모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장가들 나이도 도망을 치고 없었지요. 그림 그리기는 끝도 한도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의 소중함 앞에 목숨은 한낮 가랑잎이었어요. 

 

 

그가 무릎을 꿇고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병정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눈을 내려 감은 채 결박을 받았지요. “네놈의 죄가 얼마나 무거ㅜㄴ지 알고 있으렷다.” 그는 냉기 서린 눈으로 성주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고는 성주 옆에 있는 지루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눈길이 부딪치자 지루는 외면을 해 버렸습니다. “저 당돌한 놈을 당장 형장으로 끌고 가라! 감히, 감히….” 성주는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는 성 밖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멀리서 메아리쳐 가는 사람들의 함성을 들은 듯했습니다. 그 누구의 설명이 없어도 그 함성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는 익히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하부르타식 질문의 예:

1. 화가 솔거는 왜 매서운 눈초리로 지루를 쳐다보았을까요?

2. 성주는 왜 솔거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의 발을 구르며 소리쳤을까요?

3. 신하들은 왜 성주에게 거짓말을 했을까요?

4. 화가 솔거는 왜 죽을 것을 예상했을까요?

5. 화가 솔거는 왜 결국 죽음을 택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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